법원 “블랙리스트는 직권남용” 김기춘 유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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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블랙리스트’ 사건 1심 선고공판이 2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재판 뒤 호송차로 가고 있다(왼쪽 사진). 이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장진영·우상조 기자]

‘블랙리스트’ 사건 1심 선고공판이 2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재판 뒤 호송차로 가고 있다(왼쪽 사진). 이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장진영·우상조 기자]

박근혜 정부가 문화예술계 단체와 인사를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1심 법원이 직권남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로 김기춘(78)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7명이 기소된 지 약 6개월 만이다.

김상률 등 5명도 같은 혐의 유죄 #조윤선은 국회 위증만 인정 집유 #법원 “범행 지휘했다 보기 어려워 #박 전 대통령 공범 인정엔 부족” #특검팀 “판결문 검토해 보겠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 황병헌)는 27일 김 전 비서실장에게 직권남용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강요 혐의는 무죄가 선고됐다.

함께 기소된 김상률(57)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징역 1년6월·법정구속), 김종덕(60)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징역 2년), 정관주(53) 전 문체부 1차관·신동철(56)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각 징역 1년6월), 김소영(51) 전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징역 1년6월·집행유예 2년) 등 5명에게도 직권남용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조윤선(51) 전 문체부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블랙리스트 집행 등을 직접 지시하거나 보고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조 전 장관은 국회 위증 혐의만 인정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 온 조 전 장관은 이날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돼 귀가했다. 그는 “저에 대한 오해를 풀어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2심 재판도 성실히 끝까지 임하겠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김 전 비서실장의 유죄 이유에 대해 “오랜 공직 경험을 가진 법조인이자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해 누구보다 법치주의를 수호하고 적법 절차를 준수해야 했음에도 불법적 지시를 가장 정점에서 내리고 실행 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또 “정치 기호에 따라 지원금을 차별한 것은 건전한 비판·창작 활동을 저해할 수 있어 헌법정신에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양형 이유에서는 “통치권자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실장 등에게 부여된 막대한 권력을 남용해 법치주의와 국민의 신뢰가 훼손됐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재판에서 김 전 비서실장 등이 “오랫동안 좌편향돼 있던 지원 제도를 바로잡은 것”이라고 항변한 것에 대해서는 “정책 결정으로 평가받으려면 투명하게 추진돼야 했는데 반대로 은밀하고 위법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야당 지지나 세월호 시국선언 등은 자율적 심사 과정에서 적용될 기준으로 보기도 어렵다”고 판시했다.

블랙리스트 정책에 미온적으로 대처한 문체부 1급 실장 3명에게 사표를 강요한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이유는 “1급 공무원은 국가공무원법상 신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면직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7명의 피고인은 일렬로 피고인석에 앉아 선고 결과를 들었다. 파란색 하복 수의를 입은 김 전 실장은 재판부가 선고문을 읽은 약 1시간 동안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조 전 장관도 눈을 감고 앉아 있었고, 김소영 전 비서관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김 전 실장에게 징역 3년이 선고되자 방청석에서는 ‘아’ 하는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판결은 박 전 대통령 사건의 1심 판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의 18개 혐의 중 3개(강요,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문체부 1급 공무원 인사 조치)가 이날 선고된 사건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이날 강요 혐의와 관련해 ‘대통령의 불법 지시’라는 표현을 썼다.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와 관련해서는 “박 전 대통령이 문체부 보고를 받았을 개연성이 크지만 범행을 지시 또는 지휘했다고 보기 어려워 공범으로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명시했다. 이에 대해 법원 측은 판결 선고 이후 “박 전 대통령은 담당 재판부가 다르기 때문에 그의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가 무죄라는 의미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날 판결에 대해 특검팀은 “판결문을 검토해 보겠다”며 말을 아꼈다.

윤호진·김선미 기자 yoong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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