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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 배우들 일본인 역 열연, 일제 강점기 영화 실감 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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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

지난 6월 말 개봉한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에는 내가 주목하는 배우가 나온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도 나온 김인우씨다.

그가 내 눈에 들어온 건 일단 일본어가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주’에서 시인 윤동주를 취조하는 일본인 형사를 맡았다. 한국에서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가 잇따라 개봉되고 있지만 항상 아쉽게 느끼는 점이 일본인 역 배우들의 일본어다. 영화의 다른 부분이 아무리 좋아도 배우의 일본어가 어색하면 영화에 몰두하기 힘들다. 영화를 보면서 일본어가 완벽하고 연기도 잘하는 김씨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는 ‘자이니치’였다. 자이니치는 재일(在日)의 일본식 발음이다. 일본에서 자이니치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이나 그 자손들을 가리킨다. 김씨는 자신을 ‘재일동포 3세’로 소개한다.

나는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유학생이지만 1월 말까지 일본 아사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기자로 일하던 지난해 2월 ‘동주’를 본 뒤 김씨를 인터뷰하는 게 퇴사 전 목표가 됐다. 지난해 가을 ‘기적적으로’ 한국에 출장 갈 일이 생겨 김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인터뷰 기사가 기자로서 쓴 마지막 기사가 됐다.

김씨 같은 재일동포 3세들은 한국에서 유학을 하든 민족학교에 다니든 따로 한국어를 배우지 않는 한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를 못하는 자이니치 대부분이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인데 왜 우리말을 못하느냐”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일본에서 차별 대우를 받고, 조국이라 생각했던 한국에서도 무시당하면 정말 속상할 것 같다.

김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쿄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아주 힘들 때 한국 영화 ‘집으로…’(2002)를 보고 한국 영화에 매료됐다고 한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그에게 ‘집으로…’는 모성애를 느끼게 해 줬다. 그는 “내게 사랑을 준 첫 영화”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국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2008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어학당부터 등록한 그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어를 못하는 게 억울해 매일매일 밤늦게까지 한국어 공부만 했다고 한다. 엄청난 노력 끝에 ‘암살’ ‘아가씨’ ‘덕혜옹주’ 등 20여 편의 영화에 일본인 역으로 출연했고 무대인사도 유창한 한국어로 할 정도가 됐다.

‘동주’에서 그의 인상적 연기는 윤동주를 취조하며 말없이 흘린 눈물이었다. 윤동주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는 장면에서다. “자이니치로 태어났기에 어릴 때부터 일제강점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깊은 연기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이다.

그는 ‘박열’에서 더 나쁜 역을 맡았다. 간토(關東)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유도하고 그것을 은폐하려 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역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쁜 일본인 역을 할 수 있는 건 자이니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 배우가 일제강점기를 비판적으로 그리는 한국 영화에 출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서 말이다.

‘박열’에는 김씨 외에도 일본어 네이티브 배우가 10여 명 출연한 덕분에 몰입감이 더욱 높아졌다. 이들 대부분이 도쿄의 극단 ‘신주쿠양산박(新宿梁山泊)’ 멤버다. 영화에서 박열에게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장을 연기한 김수진씨가 극단 대표다. 그 또한 자이니치이며 유명한 무대 연출가다. 김 대표도 박열이 법정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해 호소하는 장면에서 복잡한 내면 연기를 보여 줬다.

얼마 전 만난 이준익 감독은 “그런 표정이 나온 건 김 대표가 재일동포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한국 영화 팬으로서 ‘자이니치’라는 일본어 네이티브 배우들의 활약 덕분에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게 무척 기쁘다. 한국 영화 출연이 그들로서도 보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활약을 계기로 자이니치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과 이해가 더욱 깊어지길 기대한다.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동국대 대학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