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베스트] 희망 따윈 없다, 경계 안에 웅크린채 죽어갈 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6월 출간된 신간 중 세 권의 책을 ‘마이 베스트’로 선정했습니다. 콘텐트 완성도와 사회적 영향력, 판매 부수 등을 두루 고려해 뽑은 ‘이달의 추천 도서’입니다. 중앙일보 출판팀과 교보문고 북마스터·MD 23명이 선정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아이 잃은 부부 일상 처연히 재현 #죽은 존재가 화자로 등장하기도 #힘겨워도 발랄했던 이전과 달리 #삶의 무게속으로 자꾸 가라앉아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문학동네

김애란의 신작 소설집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젊은작가상 수상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포함해 단편 7편을 묶었다. 5년 만의 단편집이다. 기대보다 걸음이 느리다. 김애란은 숱한 문학상을 휩쓸면서도 독자 반응 또한 뜨거운 몇 안 되는 한국 작가이어서이다.

이번에도 다섯 글자다. 김애란은 유난히 다섯 글자 제목의 소설을 많이 썼다. 김애란은 이제껏 단편소설 32편을 발표했는데 이 중에서 11편의 제목이 다섯 글자였다. 이번 책까지 김애란은 단편소설집 네 권을 발표했다. 이 중에서 세 권의 제목이 다섯 글자다.

책 제목 ‘바깥은 여름’은 수록작 ‘풍경의 쓸모’의 한 구절이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182쪽)’에서 따왔다. 다른 건 공간인데 시간이 다르다고 김애란은 말하고 있다. 같은 소설에서는 아버지를 ‘다른 시대가 아닌 다른 세계에 살다 이쪽으로 넘어’왔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 어디쯤에서 30대 중반의 김애란은 서성거리는 듯 보였다.

책 제목이 자꾸 걸린다. 바깥‘이’ 여름이 아니라 바깥‘은’ 여름이어서 안은 겨울일 수밖에 없다. 세상과 나 사이에 경계를 짓고 그 경계 안에서 옹크린 채로 늙거나 죽는 우리가 보인다. 하여 소설은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어가는 이야기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일상을 처연히 재현하거나(‘입동’), 병든 개와 늙은 할머니의 불편한 동거를 지켜보거나(‘노찬성과 에반’), 창졸간에 남편을 여읜 여자의 슬픔을 기록한다(‘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서울 정동길을 찾은 김애란 작가.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소설집을 펴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정동길을 찾은 김애란 작가.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소설집을 펴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침묵의 미래’에서는 차라리 죽은 존재가 화자로 등장한다. ‘침묵의 미래’의 화자는 지구의 어느 인종도 사용하지 않아 소멸한 소수언어다. 최후의 화자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웅얼대는 순간을 김애란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것은 빙하가 무너지는 풍경과 비슷했다. 수백만 년 이상 엄숙하고 엄연하게 존재하다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는 얼음의 표정과 비슷했다(143쪽).’ 소설을 읽는 계절은 폭염주의보 문자가 배달된 복중의 여름날이었지만, 소설을 읽는 시간은 추웠고 차라리 으스스했다.

20대의 김애란은 아무리 힘들고 버거워도 삶을 사는 이야기를 했다. 집 나간 아버지 대신 택시기사로 일하는 어머니와 아등바등거려도(‘달려라, 아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컨테이너박스 안에서 세 식구가 엉켜 살아도(‘스카이콩콩’, 2005년), ‘나의 하늘은 당신의 천장보다 낮은’ 반지하방에 빗물이 차올라도(‘도도한 생활’ 2007년) 김애란이 빚어낸 인물은 어떻게든 이 험한 세상을 살아냈고, 살아내려 바둥거렸다.

그러나 김애란은 더 이상 우리네 삶에서 희망 따위를 찾지 않는다. 김애란의 작가 이력도 어느새 15년째다. 그 세월만큼 인생의 중력에 익숙해진 것인지 그래서 더 가라앉는 것인지, 아니면 도저히 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괜스레 안타깝다.

여하튼 이번 책에서 김애란은 발랄하지 않다. 이전의 김애란이 삶의 비애를 톡 건드렸다면(김애란 식으로 말해 삶의 비애를 피아노 건반음 ‘파’처럼 쾌활하게 처리했다면), 오늘의 김애란은 삶의 무게 속으로 꾸역꾸역 침전한다. 김애란을 읽는 입장에선 잠깐 울컥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이 온통 뿌얘진다.

그럼에도 소설은 잘 읽힌다. 이유는 앞서 언급한 다섯 글자 제목과 관련이 있다. 3·2음절 또는 2·3음절로 이루어진 두 마디의 음악에 김애란은 본능적으로 올라탈 줄 안다. 다만 장단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전의 김애란이 자진모리로 몰아갔다면 오늘은 진양조로 늦추고 낮췄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