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앞집 여자'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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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보통 남자'가 아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와도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다. 공인된 아내가 있는 이 남자의 '외도'에 주변인들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선택된 여자들은 오히려 그 남자가 한번이라도 안아주기를 갈구하는 모습이다. 사랑해서라기보다 그 남자와의 결합이 자신과 가족의 신분을 높여준다는 게 진짜 이유다. 도대체 그는 누구이며 그는 왜 예외인가. 그는 왕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나타난 숙종과 장희빈의 행각을 불륜이라고 보는 시각은 없다. 그것은 이미 3백년 전의 일이고 그때 그들은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03년 여름 시청자들은 수요일과 목요일 비슷한 시간에 개성 강한 여성들을 두루 만나 왔다. '장희빈'(KBS2)과 '앞집여자'(MBC) 거기다 '요조숙녀'(SBS)까지. 이들의 감성지수는 일단 덮어두고 윤리지수를 찬찬히 헤아려 보자.

윤리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다. 김혜수가 연기하는 장씨는 목표달성을 위해서라면 음모와 살인도 불사한다. 홈페이지에 나타난 '요조숙녀'(김희선 분)의 인생 목표는 오로지 부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다. 현재 양다리를 넘어 '세 다리, 네 다리를 걸쳐 놓고 있는 상태'다.

21일 종영한 '앞집 여자'에 대해 방송위원회는 뒤늦은 경고와 함께 시청 등급을 '15세 이상 가'에서 '19세 이상 가'로 올렸다. '불륜'을 일반화하고 조장하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어 청소년들에게 유해할 수 있다는 판단이라고 한다.

결국 '아직도 여자이고 싶고 다시 한번 예쁜 사랑이 하고 싶은 철없는 아줌마' 미연(유호정)이나 '애교 많고 활기 넘치고 센스 있고 요리솜씨까지 좋은' 애경(변정수), 그리고 '실업자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는 억척가장' 수미(진희경) 같은 '앞집여자'들의 지나치게 솔직한 욕구표현이 문제라는 것이다.

어릴 때 '미성년자 관람불가'를 무시하고 보았던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1968년 작품)은 불륜을 다룬 비극영화였다. 35년 뒤의 '앞집 여자'는 명랑 불륜 코미디를 표방한다.

기획의도 역시 평범한 30대 부부 세 쌍의 결혼과 외도를 통해 '지금 당신의 결혼은 안녕하십니까'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사랑과 결혼의 성분에는 동물성도 있고 식물성도 있고 광물성도 있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면 가정이 균형을 잃는다고 이 드라마는 경쾌하게 속삭인다.

'앞집 여자'들은 과거를 전복시키고 현재를 새로 구축하고픈 여자들이 아니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위들은 머리카락도 자르고 파도 자르지만 실제로 그들이 자르고 싶은 건 삐죽삐죽 솟아나는 거친 욕망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 자르는 과정의 솔직함이 빚어내는 상처들도 있다는 걸 제작진이 모를 리 없다. 성스러운 대화보다 상스러운 대화가 넘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면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의 거리나 속도 조절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때로 윤리는 법리보다 견고하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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