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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식, 죽었던 의결권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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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광기
김광기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김광기 제작2담당·경제연구소장

김광기 제작2담당·경제연구소장

한국 주식이 강해졌다. 코스피지수는 올 상반기 중 18% 올라 세계 주요국 증시 중 최고를 기록했다. 대통령 탄핵정국과 정권교체, 북한의 미사일 도발,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압박 등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단기간에 숨 가쁘게 달려온 만큼 휴식을 거치겠지만 큰 상승흐름은 하반기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올 들어 주가 급등엔 ‘스튜어드십 코드’ 한몫 #일반주주 대변할 청지기 사외이사 등장 관심

과연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바닥을 친 기업 실적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뭔가 강력한 재료가 새로 등장한 게 분명하다. 죽어 있던 주식 의결권의 부활이 그것이다. 이제껏 주식 의결권은 기업 오너 등 소수 지배주주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그러나 기관투자가와 소액주주도 적극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생긴 ‘스튜어드십 코드’가 대표적이다.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을 말한다. 스튜어드가 주인의 재산을 제대로 지키고 관리하는 청지기를 뜻하는 데서 따온 용어다. 이 코드를 채택한 기관투자가들은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 때 시시비비를 가려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제껏 기관투자가들은 기업 경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식을 내다팔고 떠나는 선택을 주로 했다. 하지만 앞으로 기업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이 제도가 박근혜 정부에서 신제윤~임종룡 금융위원장의 지휘 아래 3년 산고 끝에 탄생한 게 흥미롭다. 문재인 정부도 꼭 가고 싶었을 길을 미리 잘 닦아놨으니 말이다. 눈치를 보던 기관투자가들은 새 정부가 들어서자 앞다퉈 동참을 표명하고 있다. 그 숫자가 벌써 50개에 육박하는 가운데 하반기에는 국민연금까지 가세할 움직임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은 한국 자본시장의 투자 행태를 바꿀 기념비적 사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의지도 그렇지만 기관투자가에 돈을 맡기는 일반 투자자들이 적극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잖은 공개기업 오너가 전횡과 오판으로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보며, 이젠 따끔한 견제와 감시가 있어야 경영이 잘되고 주가도 오를 것이란 인식이 확산되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같은 조건의 글로벌 기업들 주가와 비교할 때 한국 증시에는 여전히 30% 정도의 디스카운트가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바로 재벌 등의 전근대적 지배구조 탓이다. 거꾸로 이게 개선되면 주가가 30% 오를 여력을 확보한다는 얘기가 된다.

스튜어드십 코드만으론 부족하다는 시각도 있다. 주식 의결권 행사는 연간 한두 번 열리는 주주총회를 통해 이뤄져 일상 경영을 감시하는 데 한계가 따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상장기업의 오너 지분은 3~4%에 불과하지만 계열사 지분을 동원하면 평균 44%로 불어나 그 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

장벽을 넘을 사다리로 집중투표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전망이다. 이는 주총에서 이사를 뽑을 때 1주당 1의결권을 주는 기존 방식과 달리, 선임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예를 들어 이사 3명을 뽑는다면 1주당 3표를 확보해 한 명에게 몰아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일반 주주들도 연합해 독립적 사외이사를 이사회에 진출시켜 일상적으로 경영 활동을 관찰하는 게 가능해진다.

집중투표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재계는 경영권 침해의 소지가 크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의 공격을 우려하는 소리가 크다. 그러나 대략 8~10명으로 구성되는 이사회에 1~2명의 독립적 사외이사가 들어와 봐야 의사결정을 뒤집기는 역부족이다. 그보다는 거수기가 아닌 청지기로 눈을 부릅뜨고 이사회에 앉아 있으면서 허튼 결정을 방지하는 효과가 더 크지 않을까.

집중투표제는 상법 개정 사항이다. 이게 시행되면 스튜어드십 코드와 어우러져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본격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공은 머지않아 국회로 넘어가게 된다.

김광기 제작2담당·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