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 따려 노력한 건 어디서 보상받죠?"...블라인드 채용하겠다는 공공기관에 하소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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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경제부 기자

장원석경제부 기자

면접 중 자살 소동이 벌어진다. 당신이 지원자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2014년 하이네켄은 일부러 이런 상황을 연출해 반응을 살폈다.

학점도 기재 금지, 성취 부정 우려 #"블라인드 채용한다면서 #지역 할당제는 또다른 역차별 소지" #뚜렷한 지침 없어 취준생들 혼란 #서둘지 말고 ‘가이드라인’ 준비를

최종 합격자는 소방관의 요청에 가장 먼저 구조용 매트를 든 지원자였다. 하이네켄은 이런 채용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마케팅용 이벤트였지만 메시지는 강렬했다.

눈에 띄는 장면은 또 있었다. 지원자에게 장점을 물으면 하나같이 ‘열정’이라 답한다. 단점을 물으면 대부분의 답은 ‘고집’이다. 관심사도 취미도 비슷했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지원자는 특색이 없고, 기업은 가려낼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학력과 스펙에 기대는 풍조가 생겼다.

정부가 5일 발표한 블라인드 채용 추진방안에 따르면 공공기관 입사지원서에 출신대학·신체조건 등을 기재할 수 없다. 사진 부착도 금지한다. 학점도 안 된다. 총점은 기재할 수 없고, 직무에 연관된 특정 과목 학점만 가능하다. 뿌리 깊은 학연·지연의 끈을 끊고,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겠다는 취지니 방향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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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우려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학력과 학점이 차별이냐’라는 문제다. 정부는 선진국도 블라인드 채용을 활용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인종이나 나이·성별 등 인권과 직결된 차별을 막기 위한 조치다. 학력과 학점은 범주가 다르다. 여기에도 부모의 재력·영향력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볼 순 없다.

그렇다고 개인의 정당한 노력과 성취마저 부정해선 안 된다. 더욱이 학점은 성실도와 열의 같은 인성과 직결된다. 최근 민간기업이 가장 중요하게 꼽는 채용 기준이다. “수업 한 번 안 빠지고, 학점을 올렸는데 속상하다”는 취업준비생의 토로가 이기심 때문만은 아니란 얘기다.

특정 비율로 지역 출신을 뽑는 할당제도 따져볼 문제다. 공공기관 입사 지원서에 출신 대학이 어느 지역에 있는 지는 쓸 수 있다. 물론 서울에 소위 명문대가 밀집하고, 청년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비정상적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선 어떤 형태로든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블라인드 채용이 ‘역차별’을 조장해선 안 된다. 이런 식이라면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진학한 대졸 취준생은 공공기관에 취업할 때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수도권 출신인데 지역의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은 공공기관 취업에 유리해진다.

더 중요한 건 대체 어떻게 뽑겠다는 건지 취준생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면 도리어 ‘블라인드 부정’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블라인드 부정은 적발도 어렵다. 정부는 연말까지 전 공공기관에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중심 채용을 도입할 예정이다.

현재 847개 직무에 대한 기준이 마련돼 있는데 해당 직무에 관한 교육을 얼마나 받았고, 기술은 어느 정도 보유했는지를 따지겠다고 한다. 이런 기준은 다듬고 또 다듬어서 정밀해야 한다. 그게 갖춰진 뒤 제대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야 한다.

이번 방안은 문재인 대통령이 관련 언급을 한 지 단 12일 만에 나왔다. 그리고 당장 하반기부터 전 공공기관에서 동시에 실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시범사업을 하고, 부작용을 검토한 뒤 진행해도 늦지 않은데 너무 서두르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정책이 현장에 뿌리내릴 때 가장 중요한 건 디테일이다. 이걸 놓치면 방향이 아무리 옳아도 산으로 간다.



공공기관 지원서, 얼굴 사진 빼고 학력 칸 없앤다
 정부, 블라인드 채용 방안 발표

올 하반기부터 공공기관 입사지원서에서 지원자의 출신지역·신체조건·학력·학점 등의 항목이 사라진다. 면접관에게 사전에 지원자 인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금지한다. 이른바 ‘블라인드 채용’이다.

고용노동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이 같은 내용의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 추진방안’을 5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경비직이나 연구직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지원자에게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게 금지된다.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전부다.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서류전형 없이 필기시험을 치르는 경우를 제외하고 사진을 부착하는 것도 안 된다. 지역인재선발전형을 활용하는 경우에도 대학의 이름 대신 대학 소재지를 기재하도록 할 방침이다. 이성기 고용부 차관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이 똑같은 출발선에서 실력으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달 중 블라인드 채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332개의 모든 공공기관에 배포한 뒤 전면 시행할 방침이다. 149개 지방 공기업도 인사담당자 교육을 거쳐 8월부터 시행한다. 주요 공공기관은 올 하반기 대략 1만 명을 채용할 예정이다. 더불어 민간으로도 블라인드 채용방식을 확산시킨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채용 수요가 있는 중견·중소기업 400곳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하고 인사담당자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한다. 또한 하반기 중 민간기업의 채용 관행을 조사해 입사지원서 요구항목, 블라인드 채용현황 등 개선이 필요한 사항을 발표하기로 했다.

세종=장원석 경제부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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