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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속으로

오늘의 논점 -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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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중앙일보 <2017년 6월 22일 30면>
사법부의 정치화 우려된다

QR코드로 보는 관계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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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내홍(內訌)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전국 법원의 판사 100명으로 구성된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어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추가 조사키로 한 지난 19일의 결의 내용을 법원행정처에 전달했다. 판사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과 수뇌부를 믿지 못해 직접 규명에 나서겠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판사 사회 내부에서 대표성 논란과 함께 사법부까지 정치 바람을 타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사태는 올 3월 법원 내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판사들을 상대로 ‘사법 독립과 법관 인사제도에 관한 설문조사’와 학술대회를 추진하면서 촉발됐다. 이 움직임이 알려지자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가 행사를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나아가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판사들의 명단을 관리하고 있다는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로 번졌다. 진상조사위원회는 블랙리스트에 대해선 ‘사실무근’으로, 사법행정권에 대해선 조직적 개입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발하는 일부 판사들이 불만을 제기하면서 양승태 체제를 둘러싼 갈등과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비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도 견제할 수단이 없다는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 예산권과 인사권을 틀어쥐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특정 세력이 힘을 과시하듯 집단행동을 하는 모양새는 순수성과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

사법부는 대대적인 ‘사법 권력’의 교체기에 들어간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중 9월 퇴임하는 양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 13명 가운데 12명을 임명한다. 사법개혁을 주장하는 판사 출신이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된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일수록 양심과 소신으로 법의 안정성과 독립을 지켜내는 것이 판사의 숙명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사법부가 정치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3권 분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다.

한겨레 <2017년 6월 20일 27면>
‘블랙리스트’ 조사 나선 법관들, 사법개혁 불씨 되길

QR코드로 보는 관계기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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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급 법원을 대표하는 판사 100명이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어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직접 조사하기로 결의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향해 조사권한을 위임해줄 것과, 법원행정처 차장과 법관들이 사용한 컴퓨터를 보존하고 조사 방해자는 직무배제할 것도 요구했다. 양 대법원장은 의혹이 더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조사 결과에 따라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은 물론 양 대법원장의 책임 문제로까지 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법관들은 그동안 사법부 독립이 흔들리거나 내부의 비민주적 행태가 드러날 때마다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이번에도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문제 삼는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행사를 앞두고 법원행정처가 압력을 행사한 게 발단이 됐다. 진상조사위가 조사에 나섰으나 법원행정처장이 블랙리스트 관련 컴퓨터 조사를 거부하고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선에서 미봉하는 바람에 논란이 커졌다. 전국 법원에서 줄줄이 회의를 열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만큼 법원 내부에 쌓여온 적폐가 심각했다는 뜻일 것이다. 철저한 진상규명으로 8년 전 신영철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의 재판 간섭 사건처럼 용두사미로 끝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애초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행사를 둘러싼 갈등은 대법원 수뇌부에 대한 판사들의 불신에서 비롯됐다. 제왕적 대법원장이 문제가 된 데는 ‘양승태 대법원 체제’가 국민적 신뢰를 잃은 것도 한 요인이 됐을 것이다. 특히 박근혜 정권 들어 권력 주변에서 불거진 석연찮은 행적은 사법부 불신을 불러왔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일지에 등장한 ‘법원 길들이기’나 ‘법원 지도층과의 커뮤니케이션’ 등의 표현들은 청와대와 대법원의 부적절한 거래 의혹만 남긴 채 덮였다. 청와대 민정수석과 법원행정처 차장의 빈번한 연락도 마찬가지다.

법관들은 이번 회의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과 관련한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책임 규명은 물론이고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도 결의했다고 한다. 대표회의가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 혁파와 법원행정처 축소 등 사법부 관료주의를 혁신하고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불씨가 되기를 기대한다.

논리 vs 논리
집단행동으로 진정성 의심받을 수도 vs 관료주의 혁신 불씨 돼야

사법 개혁을 논의하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지난달 19일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렸다. [뉴시스]

사법 개혁을 논의하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지난달 19일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렸다. [뉴시스]

우리 헌법 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적혀 있다. 재판이 외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헌법의 정신을 뿌리부터 흔들 만한 일이다. 사건의 발단은 판사들의 연구 모임이 열려 하던 대법원장 권한 분산에 대한 세미나를 법원행정처가 방해하려 했다는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국제인권법연구회는 전국 3000여 명의 판사 가운데 480여 명이 참여하고 있는 학술 모임으로, 진보성향을 띠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모임을 추진하던 이모 판사는 모임을 축소하라는 상부 지시에 반발해 사표를 내며 “법원행정처 컴퓨터에 판사들 뒷조사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고 발언했다. 법관들의 정치적 성향 등을 조사한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따라 법관들의 인사가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사법부의 공정성은 일거에 무너지고 만다. 이 때문에 지난달 19일 전국 법원을 대표하는 판사 100명이 모여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고 이 사건을 직접 조사하겠다고 결의했다.

이에 대해 한겨레와 중앙은 8년 만에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취지에 한목소리로 공감을 보낸다. 한겨레는 대표회의가 “대법원 수뇌부에 대한 판사들의 불신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승태 대법원 체제’가 국민적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중앙 또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비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도 견제할 수단이 없다는 지적에는 일리가 있”으며 “예산권과 인사권을 틀어쥐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수긍이 간다”며 법관대표회의 주장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법관대표회의에 대한 평가에서는 두 사설의 입장이 완전히 갈린다. 한겨레는 대표회의가 “사법부 관료주의를 혁신하고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불씨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높은 점수를 준다. 반면 중앙은 “특정 세력이 힘을 과시하듯 집단행동을 하는 모양새는 순수성과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며 우려를 보낸다. 두 사설의 생각이 이렇듯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한겨레는 박근혜 정부 때 불거졌던 사법 의혹들을 조목조목 짚는다.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일지에 등장한 ‘법원 길들이기’나 ‘법원 지도층과의 커뮤니케이션’ 등의 표현” “청와대 민정수석과 법원행정처 차장의 빈번한 연락” 등이다. 우리 법조계에는 “재판 안 하는 판사와 수사 안 하는 검사가 잘나간다”는 속설이 돌기도 한다. 그만큼 대법원장에게 인사권이 집중되어 있고 법원과 검찰 조직의 관료화가 심각하다는 의미다. 이러한 구도에서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법관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겨레가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 혁파와 법원행정처 축소” 등을 내세우는 법관대표회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다.

중앙은 한겨레와 다르게, 전국법관대표회의 개최를 ‘사법부의 내홍(內訌)이 깊어지는 양상’이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중앙은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 대법관 13명 가운데 12명이 새로 임명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헌법에 따르면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나아가 대법관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정치적 성향이 대법관 인선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새로 임명된 김형연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사법부가 정치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중앙이 경고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이렇듯 전국법관대표회의에 대한 중앙과 한겨레의 평가는 엇갈리나 두 사설이 주장하는 바는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겨레는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인사권을 독점하는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에서 나타나기 쉬운 정치적 보복과 법관 길들이기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중앙은 특정한 정치적인 성향을 지닌 집단이 사법 개혁을 추진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사법부의 정치화’를 우려한다. 우리나라의 사법 신뢰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34개국 가운데 33위를 차지했다. 사법 개혁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