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나는 ‘영화 손 간판’ 명맥 잇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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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의 광주극장은 82년 역사를 자랑한다. 1935년 문을 연 이곳의 낡은 외관과 허름한 내부는 시간이 멈춘 듯한 인상을 준다. 타지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다.

‘마지막 영화 간판장이’ 박태규 #광주극장서 13년간 그리다 퇴직 #영화 손 간판, 실사에 밀려 사라져 #1년에 1~2개 작품 그려 명맥 유지 #‘간판학교’ 열어 비법 가르칠 계획

이 극장은 대형 복합상영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예술영화를 위주로 하루 평균 5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추억과 낭만을 선물하는 곳이다.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이를 보러오는 관광객이 많다.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극장에 내걸린 영화 손 간판을 그린 박태규 작가. 이를 보러오는 관광객이 많다. [프리랜서 오종찬]

극장을 찾는 관객을 가장 설레게 하는 요소는 따로 있다. 건물 정면 외벽에 내걸린 큼지막한 영화 손 간판이다. 빛바랜 듯한 주인공의 모습과 일정하지 않은 형태의 글자가 적힌 손 간판은 ‘촌티’가 나지만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광주극장을 찾는 이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손 간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광주극장의 명물인 영화 손 간판을 그린 사람은 박태규(52) 작가다. 전남 함평 출신으로 호남대 미대를 나온 박 작가는 92년 졸업과 함께 광주극장 미술팀에 취직해 손 간판 그리는 법을 배웠다. 작은 캔버스가 아닌 ‘큰 그림’에 관심이 많아 시작한 일이었다. 박 작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인 극장 손 간판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미술팀을 이끌던 스승인 고(故) 홍용만 부장 밑에서 1년여간 허드렛일을 했다. 박 작가는 “선배들이 손 간판을 그릴 때 쓰는 붓을 물에 빨고 무거운 간판을 옮기고 극장 외벽에 설치하는 일부터 했다”고 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이후 선배들과의 공동작업으로 1년에 70~80개의 손 간판을 그렸다. 광주 지역 다른 극장의 요청을 받고 그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왕성했던 활동은 2005년까지였다. 90년대 후반부터 대형 복합상영관이 생겨나면서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은 관객이 점점 줄었다. 에나멜페인트와 붓으로 직접 그린 손 간판 대신 출력한 실사 간판이 극장 앞에 내걸리기 시작했다. 개성은 없지만 비용이 적게 들고 품질도 좋은 제작 방식이다. 박 작가는 “작가의 개성이 담긴 손 간판이 실사 간판에 밀리는 건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직업’으로 영화 손 간판을 그리는 일을 2005년 중단했다. 하지만 극장을 떠난 지금도 1년에 한두 개의 영화 손 간판을 그려 광주극장에 내걸고 있다. 광주극장은 박 작가가 그린 손 간판을 해당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 때에도 걸어 놓는다.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손 간판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박 작가는 5·18 민주화운동이나 세월호 참사 등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한 가상의 영화 손 간판을 그리기도 한다. 광주의 5월 정신을 다룬 ‘광주탈출’, 노근리 양민학살을 소재로 한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등이다.

‘마지막 영화 간판장이’로 불리는 박 작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 프로그램인 ‘영화 간판학교’도 준비하고 있다. 광주극장 미술실에서 10명 안팎의 시민들에게 손 간판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고 함께 작품 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광주환경운동연합의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박 작가는 “실사 간판에 밀린 손 간판은 결국 영화관에서 사라지겠지만, 그리는 사람의 개성이 담겨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손 간판을 그리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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