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80년 서울의 봄<29>|정부-국회 서로다른 개헌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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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0년 서울의 봄이 보여준 특징의 하나는 정치권의 분산이다. 어느면에서 힘을 분산한 것은 야당이기보다는 도리어 집권세력이라고 해야할지 모른다.
그 해 봄 최규하정부의 구상은 어느 것도 뚜렷이 나타나지 않은 채 지나가 버렸다. 최규하 정부는 스스로를「위기관리정부」라고 했다. 여야정당이 과도정부라고 성격을 규정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이것은 그 해 봄 내내 대립한 정부와 정당간의 거리를 말해준다.
최대통령의 고위보좌관은 최규하대행은 당시 대안이 없는 군부의 옹립으로 대통령이 됐지 공화당의 지원으로 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정 없는 안개정국>
『최대통령은 중립적인 위치에서 과도기를 이끌어갔지 김종비의 공화당에 경사 했거나. 그쪽에 어떤 언질이나 묵계를 주지 않았다. 10·26이 있었던 다음날 새벽, 백두진 국회의장에게 연락해 김종비씨등 공화당총재 고문들을 만난 이래 12·12까지는 개인적 접촉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것은 최규하정부의 중립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최규하정부가 유신체제를 기둥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정당의 기반이 없이 계엄당국과 행정조직에 의존해 있었다.
최대통령권한대행이 대통령보궐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될때도 그가 염려한 것은 야당이 후보를 내세울지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공화당이 김종비 총재를 내세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최대통령은 공화당을 멀게 느꼈을지 모른다.
최규하 정부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그 해답에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최규하정부의 지표와 노선이 무엇이었을까.
왜 스스로를 위기관리정부로 규정했을까. 그는 왜 국회가 마련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했던 당초의 약속을 철회하고 개헌의 정부주도를 밀고 가려했을까. 왜 그는 여야의 집요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일정을 내놓지 않았을까.
80년 봄을 안개정국이라고 했던 가닥들은 바로 정부와 국회, 정부와 정당간의 대립에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와 여야 정당간의 대립 중심은 헌법구상의 차이다. 최대통령이 개헌의 정부주도 의사를 시사한 것은 80년초의 연두회견때다 그때만 해도 최대통령의 그런 구상은 주목받지 않았다.
최대통령이 개헌의 정부주도를 시사하던 때는 여야 정당아 국회에 개헌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미 개헌공청회를 열고 있던 때다. 개헌공청회에선 대통령중심 직선제가 대세였고, 공화당도 이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개헌을 주도할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때의 일반 인식이었다. 당시 최대통령의 측근 보좌관의 한사람도 그런 점은 인정했다.
『그때 정부에 헌법 연구반을 구성한 것은 전적으로 최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그때만 해도 계엄당국이나 그런 쪽의 뜻이 작용한 것은 아닌 줄로 안다. 최대통령은 우리나라와 같은 정치상황에서 대통령직선제는 맞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야 정당이 모두 대통령중심 직선제로 흐르자 분위기조정 내지는 주의환기를 위해 이와는 다른 방향의 문제제기를 담당할 헌법연구반을 만들도록 했다. 그 후 권력의 분산, 권력남용의 방지, 유사시 (대통령 유고)의 안정 유지등을 감안해 이원집정부제라고 불리게 된 개헌안을 구상했고 그것을 내가 받아썼다.
이원집정부제라는 말은 그때 대통령이나 내가 쓴 것은 아니며 도리어 우리는 이것을 내각책임제로 해석했다. 정부의 개헌구상이 구체화되면서 최대통령에게 다른 생각이 있지 않느냐는 말도 있었는데 그때쯤에 상황이 다소 달라졌고, 내심까지야 나로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최대통령은 정치기반이 없었고 또 정치할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해도 최대통령이 당시의 대세나 분위기조차 못 읽었을리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넘겨버렸지만 최대통령의 구상은 결코 가볍게 흘릴 성질의 것은 아니었고 그 때문에 뒷날 심각한 정치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최대통령의 담화는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개헌에 관한 책임을 지고 있다…우리는 헌정의 중단을 경험했다. 이 교훈을 살려야한다. 이런 견지에서 정부는 헌법 연구반을 구성, 실무수준의 연구검토를 착수했다. 그간 국회에서 개헌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훌륭한 구상이 나오기를 바란다.…나로서는 헌법연구반의 작업진전에 따라 3월 중순까지는 대통령 직속하에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할 계획이다』라는 것.
그 당시의 정부구상에서 중요한 문제제기는 두가지다. 하나는 이원집정부제다. 이원집정부제는 최대통령에 의해 최초로 구상된 것이 아니다. 이원집정부제구상은 64년까지 거슬러 간다. 6·3계엄 사태때 공화당에 민간정치인들이 해엄 협상에서 당시 야당의 실력자였던 유진산씨에게 펼쳐보인 구상이다.
『박대통령을 비롯해 공화당의 중심세력은 군인들이다. 이들의 성격으로 보아 6·3사태와 같은 헌정 위기에 부닥칠 위험이 언제나 있다. 박대통령에게 외교와 안보만을 전담토록 하고 일반내정은 내각에 맡기는 절충식 내각제로 군사쿠데타의 반복위기를 막자』는 것이 최초의 이원집정부제 제기였다.
이 구상은 해엄 협상후 여야협상의제로 남겼으나 기본 합의사항이 깨져버려 구체화되지 못했다.
이 구상이 다시 제시된 것은69년 박대통령의 3선 개헌 추진때다. 헌법상 마지막 임기를 맞고있던 박대통령의 막료들은 박대통령의 계속 집권을 모색했다. 그럴때 공화당 주류로 올라선 4인체제의 리더 김성곤씨는 박대통령에게 이원집정부제구상을 제시했다. 『공화당에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 박대통령이 계속 집권해야 하는데 이대통령의 전철을 밟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내각책임제 개헌이 바람직하다. 순수 내각제가 아니라 대통령은 외교와 안보를 담당하고 비상시 국정을 주도하며 평상시의 내정은 내각에 맡겨 공화당과 야당이 국회에서 정권경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그는 말했다.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던 김성곤씨의 이 같은 제안에 대해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선 어떤 언질도주지 않았다. 그리곤 얼마뒤 이후 낙비서실장등에 의해 내각제의 개헌이 아닌 3선개헌 방침이 제시되었고 이원집정부제구상은 햇볕을 보지 못했다.
그랬던 이원집정부제가 다시 제기된 것은 71년 선거 전후다. 박대통령은 3선 개헌을 거쳐 3기 임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직선제 대통령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는 공약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역시 그때의 공화당재정위원장이던 김진만씨는 대통령에게 이원집정부제개헌구상을 제시했다.
대통령은 정당을 떠나 초당적 존재로서 외교권과 국군통수권을 행사하고 공화당과 신민당이 내정을 두고 국회에서 정권경쟁을 벌이는 헌정제도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그는 건의했다.
당시 김진만 구상은 야당의 유진산씨와의 협의까지 거친 뒤 대통령에게 제시됐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박대통령이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유신헌법을 구상하고 있던때다. 이 때문에 얼마 뒤 4인체제의 몰락을 가져와 햇볕을 보지 못했다.


이렇듯 이원집정부제는 현직 대통령의 대통령직을 보강하는 헌법구상으로 제기되었다. 따라서 최대통령이 제시한 헌법은 최대통령의 계속집권의 뜻이 담겨 있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최대통령이 처음 이를 제기했을 때는 유신세력들이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나지 않을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사람들을 대변했다. 그랬는데 차츰 최대통령구상은 유신체제 중심세력의 공감대를 넓혀갔다. 이것은 김종비총재의 자세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P씨는 말했다. 박대통령의 오랜 측근막료였던 P씨는 그 무렵 김종비총재와 만났다고 했다. 김총재는 당시의 권력중심부에 대한 연락과 협조를 의뢰했다.
그때 P씨는 김총재에게 반JP성향이던 유신체제 중심부의 사람들도 모두 포용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김총재는 이를 거부했다. 『어차피 공화당은 야당 할 각오를 해야한다. 모두 끌어들여 집권계속을 기도하기보다는 뜻맞는 사람들로 뭉쳐 1기쯤 야당도 할 생각이다』라고 김총재는 말했다고 했다.

<실망한 hr 미국행>
P씨는 그 같은 김총재의 구상은 최대통령부근을 실망시켰다고 했다. 이후낙씨도 김총재의 태도에 실망해 미국으로 떠나버렸다면서 김총재의 그에 대한 거부와 JP구상을 알고는 갈라서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공화당과 거리를 두었고 자연 최대통령을 구심점으로 하는 모색을 하게 됐다고 했다.
최대통령이 제기하고 있던 또 다른 하나는 개헌의 절차다. 최대통령은 『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대다수의 의견이라고 본다면 개헌발의의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말했다.
당시의 유신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는 헌법개정은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로 발의하며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은 국민투표로 확정하고 국회의원이 제안한 헌법은 국회의 의결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을 거쳐 확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최대통령 정부의 이원집정부제는 대통령중심 직선제라는 여론의 흐름에 눌리고 있었다.
정부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장점을 살리는 가장 바람직한 제도가 내각제와 대통령제의 절충식헌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야 정당이 이를 반대했다. 당시의 야당인 신민당에선 익살섞인 비유로 정부구상을 비꼬았다.
『어느 미모의 여배우가 「버나드·쇼」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천재성과 나의 미모가 합치면 멋진 아들을 낳을 수 있겠지요.「버나드·쇼」는 이렇게 답변했다. 나의 추한 얼굴과 당신의 우둔한 머리가 합치면 어떤 딸이 될까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개헌의 절차였다. 여야 정당은 국회의 개헌특위가 성안한 헌법을 정부로 이송하고 정부는 이 헌법안을 대통령이 제안하는 개헌안으로 하여 국민투표에 붙인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최대통령에게 이를 강제할 길은 없었다. 최대통령이 이를 거부한다면 도리 없이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 회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신헌법은 이미 거부되었다고 선언한 야당엔 딜레마 였다.
정부와 국회간의 개헌을 둘러싼 대립은 상당기간 잠복되었다. 공화당은 정풍 운동의 북새통속에서, 신민당은 김대중씨의 입당이 중심문제가 되어 있었다.
대립이 다시 표면화된 것은 3월 하순 정부의 개헌심의위원회가 발족하면서다. 최대통령은 정부의 개헌심의위원회 개회식에서 여야 정당이 원칙적으로 합의해 성안하는 대통령중심제 개헌안을 반대했다.『국가권력이 대통령에게 과중하게 집중된 정치 제도하에서는 대통령의 유고나 돌연한 궐위가 바로 국가적 위기에 직결되기 쉽고, 또 이로 인하여 파생되는 문제들이 국가의 계속성 유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새 공화국의 정부형태로는 대통령중심제에 의원내각제를 가미한 절충형태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최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그 직전의 신현확총리 발언과 묶어져 여야 정당을 자극했다. 신총리는 일본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국정부는 앞으로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나 유신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급속한 민주화는 사회혼란을 가져오므로 단계적으로 대처해 나가겠다.… 정치문제만 너무 논의하다보면 안보와 경제에 대한 주의가 산만해지고 이에 대한 대처 노력이 모자랄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신민당은 정부의 일련의 움직임은 정치일정을 늦추면서 유신세력의 계속 집권을 기도하려는 술책이 담겨있다고 진단했다. 신민당은 민주화촉진궐기대회를 열어 정부태도를 규탄하고 공화당에 대해서는 국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했다.
신민당 일부에서는 2단계 개선론까지 제시했다. 1차로 국회가 의결한 개헌안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의결해 확정한다는 조항을 삭제하는 개헌을 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공화당은 정부가 절충식 헌법안을 마련한 것도 아니므로 국회의 개헌특위가 개헌안을 완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국회소집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여야가 국회소집 문제를 절충하고 있던 때 공화당은 이른바 제2단계 정품운동의 불길에 휩싸였다. 김종비총재의 퇴진을 요구한 이후 낙파동이 그것. 공교롭게 신민당도 6개 지구당의 개편대회가 폭력사태에 휘말렸다.
공화당이 이후 낙파동을 일단락짓고 신민당도 김대중씨의 입당포기로 문제들이 일단락된뒤 여야가 개헌문제를 다루면서 정부는 종래의 개헌구상에서 상당히 후퇴했다.
최규하대통령은 4월16일 국회의장단, 여야 총무 및 국회상임위원장들을 만찬에 초대한 자리에서 정부는 개헌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듣고 개헌방향을 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개헌구상을 일단 제시해보라는 요구에 대해 정부가 공청회 이전에 정부가 마련한 개헌방향을 제시하면 개헌방향에 압력을 가한다는 비난을 받을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총리, 헌특출석 거부>
신총리는 정부의 개헌주도가 오해를 받는 이유는 정부가 개헌주도와 함께 신당창당을 준비한다는 소문때문임을 인정하면서 정부의 신당 구상설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또 최대통령은 국회 개헌특위가 개헌안을 성안해 제시해 온다면 이를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4월23일 급기야 정부와 국회가 다시 날카로운 대립관계에 빠져들었다. 국회 개헌특위는 정부의 개헌구상과 정치일정을 듣기 위해 신총리의 특위 출석을 요구한데 대해 신총리가 거부한 것.
국회개헌특위는 신총리가 외국신문과의 회견에서 개헌과 관련해 여러 가지 의혹을 살 얘기를 했기 때문에 이런 발언의 진의를 알아보기 위해 신총리가 출석해줄것을 요구했으나 신총리는 총리가 위원회에 출석한 전례가 없다해서 이를 거부했다.
야당은 신총리의 출석거부를 국회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 국회를 정식으로 소집해 총리 불신임안을 내겠다고 해 정부·국회의 대립은 심각한 국면에 빠져드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문제도 며칠 뒤 국회개헌특위의 김택수위원장과 신총리의 막후회담에서 타결을 보았다. 신총리는 김위원장과의 비공식 회담에서 입장을 해명했다.
『정부의 개헌구상이나 개헌의 정부주도가 정부의 확고한 방침은 아니다. 정부는 나름대로 개헌의 방향에 대한 몇가지 안을 검토해왔고 정부의 헌법심의위원회에서 정부 실무진이 연구검토한 것을 토대로 개헌문제를 논의할 것이지만 이 과정에 국회개헌특위의 개헌안이 확정되면 정부도 이를 참고할 것이며 이에 대해 정부가 다른 의견이 있게되면 국회와 의논하겠다. 단언하지만 정부의 신당설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며 최대통령도 나도 헌법개정이라는 책임을 다할 뿐 개정헌법에 의한 선거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정치일정도 구체적으로 날짜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올해안에 개헌을 마무리짓고 내년 봄 이전에 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이 같은 해명에 따라 공화당과 총리사이에는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 정부와 여야당 사이의 잦은 대립과 불투명한 정치 일정등 안개정국에 대한 불신이 널리 번지면서 더 많은 문제를 자꾸 늘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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