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부·기업, 한국기업 때리기 손발 '척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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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세탁기 '플렉스워시'. [중앙포토]

삼성전자의 세탁기 '플렉스워시'. [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기업들의 한국 때리기가 거세다. 한국 기업의 제품 수입을 제한해 미국 산업을 지켜달라는 청원이 잇따르고 있다.

월풀 "삼성·LG 세탁기 수입 제한해 달라" ITC에 제소 요청 #한국기업 미국 점유율 1, 2위…경쟁력 떨어지자 정부 도움 요청한듯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철강·석유·화학 업종 ITC 제소 요청 빗발 #미 정부 "무역적자 축소" 기업 "고용 위협받아" #미 정부 '무역특혜연장법' 있어 조사 불응해도 자의적 판단, 제재 #

106년 역사의 미국 최대 가전회사 월풀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의 수입을 제한해 달라는 '세이프가드' 청원서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출했다. 세이프가드란 특정 제품의 수입이 갑작스럽게 늘어 국내 산업에 피해가 발생할 경우 수입국이 관세를 부과하거나 수입을 제한할 수 있는 조치다. 세계무역기구(WTO)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수입국의 피해 구제 수단이다.
월풀은 삼성·LG전자가 미국에서 세탁기를 인위적으로 낮은 가격에 판매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미국이 중국에 부과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의 생산 기지를 베트남·태국 등지로 옮겨 판매 단가를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철강 산업이 활황이던 1960년대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의 번화한 모습. 제조업 몰락에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폐허가 된 빈 가게가 보이는 현재.  [사진제공=BBC 방송 화면 캡처]

철강 산업이 활황이던 1960년대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의 번화한 모습. 제조업 몰락에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폐허가 된 빈 가게가 보이는 현재. [사진제공=BBC 방송 화면 캡처]

제프 페티그 월풀 최고경영자(CEO)는 성명에서 "두 회사는 미국의 무역법을 상습적으로 위반하는 유례없는 행동을 했다"고 비판했다. 만약 ITC가 월풀의 요청을 받아들일 경우 미 상무부에 관세를 부과하라고 권고할 수 있다. 관세가 부과되면 미국에서 한국산 제품은 그만큼 가격 경쟁력이 뒤처지게 된다. 현재 미국 아마존에서 삼성전자·LG전자·월풀의 27인치 드럼세탁기는 모델별로 900~1400달러의 비슷한 가격대에 판매되고 있다.
LG전자도 성명을 내고 "월풀이 미국 시장에서 LG 같은 글로벌 유명 브랜드와 경쟁할 능력이 없어 정부에 규제를 요청했다"며 "이는 소비자의 선택을 제한하는 일이다. LG전자는 월풀이 넘볼 수 없는 높은 법적 기준을 지키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미국 생활가전 1위 업체인 월풀이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밀리기 시작하자 ITC 제소를 통해 해외 기업을 옥죄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트랙라인에 따르면 미국 세탁기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지난해 1분기 16.2%에서 올 1분기 19.7%로 올랐다. LG전자도 올 1분기 16.8%의 시장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이에 비해 월풀은 같은 기간 19.7%에서 17.3%로 하락했다. 냉장고·세탁기 등 생활가전 전체로는 올 1분기 기준으로 삼성전자가 19.2%로 1위를, LG전자가 15.8%로 2위다.

월풀은 2011년에도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한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미국에서 제품을 저가에 판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 상무부는 한국 기업들에 반덤핑 관세를 매겼다. 그러나 한국은 이에 불복해 2013년 WTO에 제소해 지난해 승소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중앙포토]

이런 모습은 비단 생활가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고용창출 효과가 큰 철강·석유·화학·전자 부문 전반에서 한국·중국·일본·독일 기업을 상대로 한 제소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17일에는 ITC가 미국 태양광 업체들의 제소를 받아들여 한국·중국·말레이시아 등의 수입산 태양광 패널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지 법률 검토에 들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월 말과 2월에는 각각 한국의 석유화학제품과 합성고무에 반덤핑 예비판정을 내리기도 했다. 4월 말에는 미국의 전기모터 특허를 침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도요타와 혼다·BMW 등 25개 기업의 자동차 부품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의 민·관이 고용 확대와 자국산업 보호를 위해 손발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월 피터 나바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은 "미국 무역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에 미국 기업들도 "미국의 고용이 위협받고 있다"며 정부를 압박하는 모습이다.
한국 기업 등 미국으로 수출하는 기업들이 실제 법을 어겼는지, 미국 기업의 제소 요청이 올바른지는 ITC와 미국 정부의 판단을 지켜봐야 한다. 미국은 피소당한 외국 기업이 조사에 불응하더라도 미국 정부가 알아서 반덤핑 및 상계관세를 산정할 수 있는 '무역특혜연장법'을 시행 중이다.
블룸버그는 "지난달 ITC는 캐나다 항공기 제조사인 봄바디어에도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면서 혼란이 커지고 있다"며 "최근 커지는 무역 갈등은 트럼프식 고자세 외교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통상 압력은 커지고 있지만 한국에선 통상 조직을 어느 부처에 둘 것인지를 둘러싸고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외교부는 지난달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산업통상자원부의 통상 기능을 떼내 외교부에 통상교섭본부(가칭)를 설치하는 안을 보고했다. 산업부 전직 고위관료는 "통상 조직이 외교부로 가면 통상이슈가 외교안보의 하위 수단으로 전락한다"며 "통상 문제는 관련 산업 등 이해관계자와 긴밀하게 소통하는 부처에서 맡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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