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민생 행보, 파격만큼 정교함도 필요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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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호 02면

사설

문재인 대통령의 초반 민생 행보는 파격적이면서도 신선하다. 취임 사흘째인 지난 12일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1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전원을 연내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엿새째인 15일엔 서울 양천구 은정초등학교에서 “미세먼지 감축을 위한 응급대책으로 30년 이상 된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8곳의 가동을 6월 한 달간 일시 중단하라”고 밝혔다. 각각 업무지시 1호와 3호였다. 민생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현장 방문이라는 형식을 택해 상징성과 공감대를 극대화한 점도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대선 슬로건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비정규직 문제와 미세먼지는 국가적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전체 노동인구 중 비정규직 비율은 32.8%에 달했다. 근로자 셋 중 한 명이 파견직이나 아르바이트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갖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가운데 우리보다 비정규직 비중이 높은 곳은 스페인뿐이다. 특히 남성 비정규직 비율이 26.4%인 데 비해 여성은 41%에 달하고 청년 취업자 중 정규직은 3분의 1에 불과하다. 주로 여성과 청년이 경제적 약자인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세계 최악으로 꼽히는 미세먼지는 온 국민의 숨 쉴 권리조차 위협할 지경이 됐다. 발생 횟수가 해마다 급증하더니 올봄엔 거의 매일 ‘주의’나 ‘위험’ 수준을 맴돌았다. 국내 기준이 세계보건기구(WHO)보다 훨씬 허술한데도 그랬다. 마스크 없이 외출하기 겁나고 아이들이 맘대로 운동장에서 뛰어놀 수 없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들 문제는 호전은커녕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정치권의 탁상공론과 정부의 무능 탓이다. 지난해 20대 국회 개원 연설에서 모든 정당은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한 ‘양극화 해소’를 가장 시급한 문제로 꼽았다. 하지만 구체적 해결책을 논의하는 움직임이 뒤따르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 재계와 노동계가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규제라는 서로 다른 해법을 고집하며 대화와 타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에 대해선 국내 요인과 해외 요인, 오염원별 배출 비중과 같은 기본적 팩트부터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부처와 연구기관들마다 제각기 다른 숫자를 내놓고 있어 오히려 혼란을 부추긴다. 정책 주도권을 둘러싸고 각 부처가 갈등을 빚으니 해법은커녕 현황 파악조차 제대로 안 된다. ‘결정장애 정부’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새 대통령의 과감한 움직임이 주목을 받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파격으로 모든 일이 풀리진 않는다. 뻔히 알려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건 그만큼 복잡하고 이해관계자가 많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듯이 단칼에 베어낼 수가 없다. 비정규직 문제만 해도 기업은 물론 정규직 노동자와의 갈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 미세먼지는 산업계와 경유차 이용자들, 에너지 정책과 중국 요인 등 변수가 더 많다. 이들 이해관계자의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해결이 지지부진해진다.
설사 성공해도 ‘반짝 개혁’이 되기 쉽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노동계의 동의 없이 밀어붙이다 며칠 전 법원의 제동으로 사실상 멈춰선 성과연봉제가 이를 방증한다. 최대한 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야 지속적인 개혁이 가능해진다.

정확한 현황 파악도 필수다. 마음이 급해도 서둘러선 안 된다. 미세먼지와 비정규직 모두 시각차가 큰 사안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 원인을 밝혀야 해법에 대한 합의를 이룰 수 있다. 섣부른 결론으로 잘못된 해법을 쓴다면 예산과 자원 낭비를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문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어느 때보다 높다. 며칠 전 한국갤럽 조사에서 87%가 “잘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때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문 대통령의 초반 행보도 이런 기대에 부합한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기대 수준을 낮추고 복잡한 이해관계 방정식을 풀어낼 정교함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정부가 결론을 미리 내고 유도하려 한다는 인상을 줘서도 안 된다.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이해당사자들의 집단지성을 자극하는 공정한 중재자가 돼야 한다. 그래야 “오직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문 대통령의 다짐이 민생 문제 해결이라는 성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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