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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대출받았는데…‘신용 뇌사’의 함정

중앙일보

입력

8월에 결혼하는 회사원 김모(32)씨는 최근 전세자금 대출을 받으려다 실패했다. 4년 전 대부업체에서 급하게 300만원을 빌린 게 화근이었다. 당시 연체 없이 한 달 내로 돈을 갚아 신용등급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은행은 김씨가 대부업체 거래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대출해 주지 않았다. 김씨는 “대학생일 때 아버지가 쓰러져 갑자기 돈을 빌린 건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대학생 강모(27)씨는 지난해에 생활비를 위해 '간편 전화대출' 로 빌린 500만원 때문에 금전적 고통을 겪고 있다. 매달 25일에 내야 하는 이자 10여만원을 연체하기 일쑤다. 은행 대출을 알아봤지만 시중은행은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정부가 지원하는 저금리 대출 상품도 알아봤지만 연체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신용뇌사’에 빠진 강씨와 김씨 모두 “대부업체의 달콤한 광고문구에 넘어갔다”고 말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30일 무이자 대출’ ‘전화로 간편 대출’ ‘1분이면 OK’ 등의 내용이다.

누구나 무상담으로 100만원을 대출해준다는 한 대부업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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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대부업체에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저축은행과 대부업체에서 30일 무이자 대출을 이용한 고객 중 30일 안에 갚은 비율은 6.2%였다. 나머지 93.8%는 연 20%가 넘는 이자를 꼬박꼬박 내야 했다. 이들의 대출액은 평균 490만원으로 크지 않았다. 대출 과정이 간단하고 소액인 데다가 30일 안에만 갚으면 이자도 없다고 생각해 쉽게 빠져든다는 게 금융당국의 설명이다. 한 달이 지나면 금리도 대체로 법정 최고 금리인 연이율 29.7%로 높다.

통화 한 번으로 즉시 대출해주겠다는 한 대부업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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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대부업체 대출상품을 이용한 사실만으로도 신용등급이 대폭 떨어진다는 점이다. 떨어진 신용등급으로 인해 1ㆍ2금융권 대출을 받지 못해 대부업체에 저당 잡힌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의미다.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나이스신용평가정보, 코리아크레딧뷰(KGB) 등 신용등급평가사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신용등급 4등급인 사람이 대부업체 간편대출을 받으면 그 즉시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운 6등급으로 떨어진다. 신용등급 1등급은 평균 3.2등급, 2등급자는 3등급, 3등급자는 2.1등급이 떨어졌다. 신용등급평가사 관계자는 “대출과정이 단순한 제3금융권 이용자들 등급은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30일간 무이자 조건을 내걸고 서민을 유혹하는 대부업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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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업체들이 소액ㆍ무이자ㆍ간편 등의 용어를 앞세우며 이런 신용평가시스템을 악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이자 소액 대출을 미끼상품으로 서민들을 유혹한 뒤 그들을 ‘신용뇌사’의 함정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고리대금업체들이 무이자 조건까지 붙여가며 고객을 흡수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을 ‘신용뇌사’ 상태로 만들어 제3금융권의 잠재적 고객으로 만드는 '가두리 양식'을 하려는 것이다”고 말했다.

신용등급과 소득에 상관없이 본인 인증만으로 대출을 해주겠다는 대부업체 광고.

신용등급과 소득에 상관없이 본인 인증만으로 대출을 해주겠다는 대부업체 광고.

대부업체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지난해 10대 대부업체의 총자산과 대출 잔액은 2015년에 비해 10% 이상 증가했다. 지난해 10월 기준 10대 대부업체 대출 잔액은 8조3537억원으로 2015년 12월 7조4549억원에서 12.0% 늘었다. 거래자 수는 260만명이 넘고, 그중 대부분이 생활비로 쓰려고 돈을 빌렸다.

‘신용뇌사’의 굴레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위원회는 스코어제 등의 대책을 마련 중이다. 고상범 금융위 신용정보팀장은 “현재 신용평가사들과 신용등급 낙폭을 줄이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운영 중이다. 또 10등급제로 단순한 현 'CB등급제'를 1~1000점으로 세분화해 은행들이 10개 구분에 의존하는 게 아닌, 다양한 스펙트럼을 고려할 수 있게끔 하는 스코어제로 바꾸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출 전력이 5년간 기록되는 현행법을 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군희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금융위가 신용평가 변수를 결정하는 것부터가 올바르지 않다. 또 대부업 대출자들이 제1금융권 대출자들에 비해 연체율이 더 높다는 객관적 입증 자료가 먼저 마련된 뒤 차등 대우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도 “금융권 별 차등 대우하기보단 실제 개개인의 상환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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