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테니스 아빠, 골프 아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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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현역 여자 프로테니스 선수 마리 피에르스(프랑스)의 아버지 짐 피에르스는 테니스계에서 알아주는 악부(惡父)였다. 마리가 틴에이저였던 1990년대 초, 짐은 딸이 출전하는 대회마다 따라다니며 코치를 하고, 상대 선수에게 야유를 보내고, 딸이 경기 도중 실수를 저지르면 때리기도 했다.

짐은 93년 한 대회에서 딸의 상대를 향해 "저 ××를 죽여버려"라는 엄청난 욕설을 퍼부었다. 여자프로테니스협회는 이를 계기로 짐에게 경기장 접근 금지령을 내리는 한편 선수와 선수의 친인척, 그리고 코치의 막 돼먹은 행동을 금하는 규정을 제정했다. 소위 '짐 피에르스 룰'이다.

여자 테니스에는 유독 이런 아버지들이 많다. 이 가운데서도 옐레나 도키치(유고), 제니퍼 캐프리어티(미국), 슈테피 그라프(독일), 윌리엄스 자매(미국)의 아버지가 악명이 높다. 과년한 딸자식이, 팀의 일원도 아닌 개인 자격으로, 3백65일 세계를 떠돌며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 불안해 챙겨준다고 따라다니는 과정에서 부정(父情)이 그만 엉뚱하게 변질된 것이다. 세계 언론은 이런 아버지들을 일컬어 '테니스 아빠(tennis dads)'라고 부른다.

최근 미국의 골프전문잡지 '골프 월드' 등 일부 언론이 보도한 한국 골프선수 아버지들에 관한 얘기는 참으로 충격적이다. 몇몇 아버지가 라운드 도중 한국말로 코치를 하며, 그린으로 앞질러가 겨냥해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수신호로 클럽 선택을 지시하며, 심지어 숲에 떨어진 볼을 슬쩍 옮겨놓기도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며,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골프 월드'도 "(주로 미국 선수들이 제기하는)이같은 주장은 '직업적 시기심'과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고 단서를 달았다.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도 "코리안 파더들의 규칙위반 여부를 조사했으나 확증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당사자들로서는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겠지만 원망에 앞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대회 현장에서 일부 아버지는 경기를 망친 딸을 공개리에 꾸짖고 캐디까지 윽박지른 적이 있었다.

지난달 US오픈 때 한조에서 경기한 한국의 C선수와 K선수의 부모는 C선수가 친 공이 나무 밑으로 갔을 때 C선수의 아버지가 공을 건드렸는지 여부를 놓고 한참을 티격태격했다. 미셸 위의 아버지는 딸의 경기 매너를 나무라는 고참 선수 대니얼 아모카포니(미국)와 격렬한 입씨름을 벌였다. 많은 외국 선수가 가까이에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영어가 서투른 상당수 한국 선수들은 외국인 동료 선수들과의 대화를 기피했다. 프로암 대회 때도 동반 아마추어 골퍼들을 맞아 마치 화가 난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거액의 달러를 상금으로 받아가면서도 변변히 기부금을 낸 적도 없었다.

국가대항전도 아닌데 한글 격려문을 써들고 '코리아 파이팅'을 외치며 따라다니는 현지 교민들은 갤러리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이런저런 불만이 화살이 돼 '한국 선수의 아버지들'이라는 과녁에 집중적으로 꽂힌 것은 아닐까.

속된 말로 장사 하루 이틀 할 것 아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지만 엄연한 남의 땅이기도 하다. 미국 무대에서 제대로 자리잡으려면 골프를 잘 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국 선수나 팬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되며, 미국 문화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 첫걸음은 '극성스러운 아버지들'로부터의 독립이다. 우물쭈물하다 보면 미국의 언론은 언젠가 '골프 아빠(golf dads)'라는 불명예스러운 신조어를 만들어 한국 골퍼들에게 선물할 것이다.

김동균 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