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맛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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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그래, 이 맛이야."

몇 년 전 한 식품업체가 탤런트 김혜자씨를 등장시켜 만든 조미료 광고문구다. 단순히 '맛있다'는 말보다 훨씬 실감나는 표현이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끝 맛의 기억을 암시하는 듯하다. 요리 연구가들은 요리를 '맛의 기억'이라고도 한다. 세대를 거치며 내려온 맛의 기억들이 응축돼 나온 것이 바로 요리라는 설명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패스트푸드는 '맛의 기억'과 상극이다. 획일적이고 균일한 패스트푸드는 '맛의 기억상실증'을 부른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 푸드(slow food) 운동이다. 당시 로마 스페인광장에 미국의 맥도널드가 들어서자 분개한 일부 시민이 주도했다. 이들은 패스트푸드가 전통요리를 소멸시킨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또 조직적인 활동을 위해 이탈리아 브라에 슬로 푸드 운동본부를 설립했다. 그후 식사와 맛의 즐거움을 내걸고 전통요리의 보전에 힘을 기울여왔다. 지금은 40여개국에 7만여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프랑스에선 '미각주간'을 정해 국가적으로 어린이들에게 미각교육을 한다. 이때가 되면 일류 요리사들이 학교를 찾아 프랑스 고유의 맛을 가르친다. 예컨대 작은 접시에 갖가지 치즈를 콩알만큼 떼어놓고 맛을 비교하도록 한다. 이는 프랑스의 저명한 요리사 조엘 로브숑이 80년대 말 프랑스 정부에 직접 제안해 이뤄진 것이다. 로브숑은 "닭을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패스트푸드점의 닭다리 튀김을 그리는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고 미각교육을 시작했다.

일본의 야마구치(山口).아키타(秋田)현에서도 향토음식의 맛을 가르친다. 나중에 대도시에 나가 살더라도 고향의 맛을 기억하라는 취지다.

선진국의 미각교육은 단순히 어린이들의 편식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맛의 기억이 사라지면 고유의 음식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맛의 기억을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은 거의 문화재 보존 수준이다.

국내에선 이런 활동이 아직 활발하지 않다.'대충 먹자'는 게 더 편해서일까. 그러나 요리도 문화다. 이를 제대로 잘 음미하고 보존하는 것도 훌륭한 문화활동이다. 다음 세대가 우리의 전통 먹거리의 맛을 얼마나 기억할지 궁금하다.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