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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치쑨, 학력·경력 안 따지고 원폭 개발 인재 모시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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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23>

1 중국을 떠나기 직전 선상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칭화대학 출신 미국 유학생 일행. 넷째줄 왼쪽 첫째가 예치쑨. 1918년 8월, 상하이.

1 중국을 떠나기 직전 선상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칭화대학 출신 미국 유학생 일행. 넷째줄 왼쪽 첫째가 예치쑨. 1918년 8월, 상하이.

1960년대 중국의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 공신 명단을 보면 칭화대학 물리학과 출신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뿌리를 추적해 보면 맨 끝에 예치쑨(葉企孫·엽기손)이 있다.

콤프턴의 제자 우유쉰 영입 #자오충야오에겐 물리학 권유 #왕진창·스스위안 유학 돕고 #‘중국의 퀴리 부인’ 우젠슝 제자로 둬 #수학 천재 화뤄겅은 영국 유학 보내

예치쑨은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우리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중국과학원 학부 위원 55명이 예치쑨의 제자였고, 원자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 개발에 거대한 공을 세운 과학자 70여 명도 예치쑨의 제자였다. 한 역사가의 평이 주목을 끈 적이 있었다. “예치쑨은 이미 공자를 추월했다.”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예치쑨이 부임하기 전까지 칭화대학 물리학과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예치쑨의 인재양성관은 단순했다. “우수한 교사가 우수한 학생을 만든다.” 서구의 과학계 동태에 무심치 않았다. 1923년 미국 시카고대학 물리학과 교수 콤프턴(Arther Holly Compton)이 훗날 ‘콤프턴 효과’로 알려진 양자역학의 기본법칙 하나를 발견했다. 세계를 진동시킨 대사건이었다. 중국인 유학생 우유쉰(吳有訓·오유훈)은 콤프턴의 제자였다. “콤프턴·우유쉰 효과가 맞다”는 물리학자들이 있을 정도로 그냥 제자가 아니었다.

콤프턴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 1년 전인 1926년 가을, 학위를 취득한 우유쉰은 학계에서 공인받지 못한 콤프턴 효과를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귀국했다. 우유쉰은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었다. 이름 없는 대학을 떠돌았다. 가는 곳마다 촌놈들에게 이리 채고 저리 채였다.

예치쑨은 우유쉰이 어떤 사람인지를 꿰고 있었다. 인연 맺기 위해 애를 썼다. 안부 주고받는 사이가 된 후에도 연락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28년 8월 물리학과 교수로 영입한 후 우유쉰을 위해 중국 최초의 물리실험실을 건립했다.

예치쑨은 유가(儒家)의 풍을 갖춘 과학자였다. 자신을 낮추고, 공손과 예의를 다해 인재를 구했다. 영입한 후에도 수중에 들어왔다며 오만하게 구는 얼치기가 아니었다. 우유쉰이 학위를 받기 2년 전에 하버드대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우유쉰이 평범한 교수였을 때 이미 학내 교수들 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지만 우유쉰의 월급을 자신이 받는 것보다 높게 책정했다.

학생들의 장점도 잘 식별했다. 중국 핵과학의 비조 자오충야오(趙忠堯·조충요)는 원래 화학과 지망생이었다. 예치쑨의 권유로 물리학을 전공하고 자비로 미국 유학을 마쳤다. 귀국 후 핵물리학 인재들을 손꼽기 힘들 정도로 배출해 스승의 기대에 부응했다.

2 중공정권 선포(1949년 10월 1일) 직후 제3 야전군 사령관 천이(陳毅. 오른쪽 셋째)가 칭화대학을 방문했다. 교무위원들과 함께 천이를 맞이하는 교무위원회 주석 예치쑨(왼쪽 첫째).[사진=김명호 제공]

2 중공정권 선포(1949년 10월 1일) 직후 제3 야전군 사령관 천이(陳毅. 오른쪽 셋째)가 칭화대학을 방문했다. 교무위원들과 함께 천이를 맞이하는 교무위원회 주석 예치쑨(왼쪽 첫째).[사진=김명호 제공]

왕진창(王?昌·왕금창)과 스스위안(施士元·시사원)도 예치쑨의 도움으로 유학생활을 마쳤다. ‘중국의 퀴리부인’이라 일컫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손자며느리 우젠슝(吳健雄·오건웅)의 스승이며, 퀴리 부인 밑에서 학위과정을 마친 스스위안은 프랑스의 라듐연구소에서 구매한 라듐을 자오충야오의 핵물리 실험실에 들고 온 장본인이었다. 이 라듐은 우유쉰과 자오충야오의 연구와 후진 양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을 날린 첸쉐썬(錢學森·전학삼)도 대학 시절 전공은 기계공학이었다. 칭화대학에서 관비 미국 유학생 파견 업무를 담당하던 예치쑨이 항공 관련 유학생을 선발하는 바람에 방향을 바꿨다.

예치쑨은 인재 욕심이 많았다. 인재라는 판단이 들면 학력이나 경력 따위는 무시해버렸다. 만화 같은 실화 한 편을 소개한다. 예치쑨이 단골로 드나들던 서점에 똑똑해 보이는 점원이 있었다. 자주 다니다 보니 얘기 나눌 기회도 간혹 있었다. 접하면 접할수록 셈본에 능한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청년을 수학과 직원으로 채용했다. “직원 일하며 대학 수업을 청강해라.”

얼마 후 일본에서 발간한 수학 관련 학술지를 뒤적이던 예치쑨은 중국인 필자의 글이 실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화뤄겅(華羅庚·화라경), 몇 개월 전까지 서점 점원이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한 자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세상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장편의 논문이었다. 읽기를 마친 예치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교수 평의회 개최를 제안했다. 화뤄겅에게 수학과 강의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교수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예치쑨을 존경하던 저명한 수학과 교수가 “나는 선생을 신뢰한다”며 화뤄겅을 신임교수로 추천했다.

화뤄겅은 언어와 수학의 천재였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로 논문 세 편을 발표해 예치쑨을 즐겁게 했다. 한 학기가 끝나자 예치쑨은 있는 돈 없는 돈을 털었다. 화뤄겅을 영국으로 보냈다. “너는 일류 수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너를 믿고, 내 눈을 믿는다.” 화뤄겅은 예취쑨의 기대 이상이었다.

세계적인 수학자 반열에 오른 화뤄겅은 세상 떠나는 날까지 예치쑨을 그리워했다. 임종 몇 개월 전, 생애 마지막 편지도 예치쑨의 조카에게 보냈다. “스승 생각 날 때마다 눈물을 주체할 방법이 없다. 나에 대한 보살핌은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선생의 비극과 억울함을 풀어드리지 못한 나는 사람도 아니다.” 예치쑨의 비극은 제자에 대한 사랑과 한 여인 때문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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