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과학계 원로 “예치쑨은 물리학계의 영광”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24호 36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22-

1 칭화대학은 미국유학 예비학교였다. 1912년 뉴욕에서 열린 칭화대학 출신 미국유학생 모임.

1 칭화대학은 미국유학 예비학교였다. 1912년 뉴욕에서 열린 칭화대학 출신 미국유학생 모임.

중국의 1세대 과학자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머리 좋고 단순하다 보니 이상(理想)에 복종하고 국가와 애정에 대한 충성(忠誠)이 남달랐다. 낭만적이고 품행도 괜찮았다. 그러다 보니 듣고 또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다. 사제간의 우의(友誼)도 후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노벨상 받은 양전닝 등 과학자들 #“서거 15주년, 공정한 평가 받아야” #시카고대 물리학과 입학한 예치쑨 #“과학은 경제의 산물” 확신 #하버드 대학원 들어가 박사과정

1992년 봄 칭화대학(?華大學) 구석방에 원로 과학자 27명이 모였다. 중국 원자탄의 비조(鼻祖) 자오충야오(趙忠堯·조충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楊振寧·양진녕) 등 세계적인 과학자가 대부분이었다. “내년이 예치쑨(葉企孫·엽기손) 서거 15주년이다. 공정한 평가를 받을 때가 됐다. 동상이라도 세우자.” 미국에서 날아온 우젠슝(吳健雄·오건웅)이 핸드백을 열었다. 손수건 꺼내며 훌쩍거렸다. “비극적인 말년을 생각하면 속이 터질 것 같다.”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다.

1년이 후딱 흘렀다. 한 언론매체에 생소한 인물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중국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과 리정다오(李政道·이정도), 원자탄의 아버지 첸싼창(錢三强·전삼강)과 왕진창(王?昌·왕금창) 같은 준재들을 배출한, 중국 근대 물리학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라며 업적을 상세히 소개했다.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치쑨이 재직했던 칭화대학이 특히 심했다. “이런 대가의 족적을 우리와 단절시킨 이유가 뭐냐?”

예치쑨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렸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성황을 이뤘다. 90을 넘은 중국 과학계 원로가 몇 마디로 예치쑨을 정의했다. “예치쑨이 있었다는 것은 물리학계의 영광이며 교육계와 중국 지식인의 영광이었다.” 리정다오도 스승을 회고했다. “노벨상 받으며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예치쑨 선생이었다. 중국의 제대로 된 물리학은 선생으로부터 시작됐다.”

2 칼텍에 유학 중인 제자들을 방문한 예치쑨(앞줄 왼쪽 넷째). 연도 미상. [사진=김명호 제공]

2 칼텍에 유학 중인 제자들을 방문한 예치쑨(앞줄 왼쪽 넷째). 연도 미상. [사진=김명호 제공]

예치쑨은 어릴 때부터 유학(儒學)의 기초가 단단했다. 열일곱 살 때 이미 국내외 출판기구, 학술단체와 교류하며 성숙한 학자티를 풍겼다. 중국 고전에 관한 연구와 감상력도 뛰어났다. 독서도 건성으로 하지 않았다. 상세한 독서필기를 남기는가 하면, 전국을 유람하며 가는 곳마다 자연과 풍물을 시(詩)로 화답했다.

종교라면 무조건 반감을 느꼈다. 타고난 무신론자였지만 유물론자는 아니었다. 외국인 교사의 장례식에 함께 갔던 친구가 구술을 남겼다. “목사의 설교를 듣던 예치쑨은 짜증을 냈다. 슬퍼해야 할 자리에서 교리만 떠들어대니 못 봐 주겠다며 자리를 떠버렸다. 칭화대학(당시는 칭화학당) 재학 시절 베이컨과 헉슬리에 심취하면서 과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대학 최초의 학생단체인 과학회(科學會)를 만들어 매주 돌아가며 보고회를 열었다. 후배들에게는 타과 학생과 교류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유학을 떠났다.”

시카고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한 예치쑨은 “과학은 경제의 산물” 이라고 확신했다. 경제학과 수업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학원은 하버드대학을 선택했다. 훗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퍼시 윌리엄스 브리지먼 문하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들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학위 논문도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예치쑨은 물리학과 설립을 준비하던 모교의 초빙을 받았다. “평생을 인재 육성과 중국의 과학 사업에 일관하겠다”는 일기를 남겼다. 27세, 청년티가 물씬 날 때였다.

북양정부에 예속된 칭화대학은 교장이 전권을 행사했다. 교장은 학문과 거리가 먼 관료나 정객이 대부분이었다. 정부에서 파견 나온 소수의 고위직원들이 대학을 좌지우지했다. 교장도 자주 바뀌다 보니 정상적인 대학운영이 불가능했다.

예치쑨은 소장파 교수를 대표했다. 교수회의와 평의회를 무기로 학내의 관료들과 한바탕 치고 받았다. 교장을 내쫓고 교장이 의장을 겸하는 교수회의를 최고의결기구로 하자고 제안했다. “과학과 학술이 뭔지도 모르는 관료들이 대학 교육을 침식하고 파괴한 지 오래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에 창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며 교수치교(敎授治校)를 주장했다.

북벌(北伐)에 성공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한 후에도 칭화대학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난징정부는 젊은 교수들의 신망이 두터운 예치쑨을 난징으로 청했다. “교장 선임 문제를 함께 고민하자.” 장제스는 예치쑨의 손을 들어줬다. 교수회의가 대학을 대표하는 교수치교를 승인했다. 더 이상 정부가 교장을 임명하지 않았다.

교수치교는 교수들의 수준이 중요했다. 예치쑨은 인재발굴에 나섰다. 물리학과도 확대시켰다. 이학원(理學院)을 설립하고 수학·물리·화학·생물·심리·지학 6개 학과를 신설했다. 물리학과 교수는 자신을 포함해 두 명이 다였다. 우유쉰(吳有訓·오유훈), 저우페이위안(周培源·주배원) 등 일류 과학자들이 예치쑨의 손짓에 군말 없이 응했다.

저우페이위안이 부임하던 날, 저우의 부인에게 홀딱 반해 버렸다. 예치쑨은 미혼이었다.  <계속>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