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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우리가 핵 보유국임만 인정받으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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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8면

1 1960년대 후반, 개국원수(開國元帥) 네룽쩐(가운데)과 함께 핵실험기지를 둘러보는 왕진창(왼쪽)과 주광야(오른쪽).

1 1960년대 후반, 개국원수(開國元帥) 네룽쩐(가운데)과 함께 핵실험기지를 둘러보는 왕진창(왼쪽)과 주광야(오른쪽).

1959년 6월 중공은 개국 상장(上將) 장아이핑(張愛萍·장애핑)에게 원자탄 연구와 개발을 일임했다. 참모차장 겸 국방과학위원회 부주임 장아이핑은 당황했다. “감자 키우는 일이라면 모를까, 원자탄에 관해 아는 게 없다.” 천이(陳毅·진의) 원수가 달랬다. “모르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배우면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에는 왕진창(王?昌·왕금창)이나 덩자센(鄧稼先·등가선) 같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널려 있다.”


장아이핑은 중국 과학자들의 수준에 눈이 둥그래졌다. 1개월 후 “거국적인 지지와 지원만 있으면 1964년에 핵실험이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핵실험 성공 보고 받고도 냉정 #“원자탄,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 #저우언라이는 기뻐 “하오” 연발 #장아이핑이 연구 5년 만에 개발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책임 하에 ‘원자탄 연구발전 중앙전문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저우는 모든 권한을 중앙군사위원회 주임 네룽쩐(?榮臻·섭영진)과 부주임 장아이핑에게 위임했다.

네룽쩐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당시 중국의 과학계통 종사자는 190여 만 명에 불과했다. 미국 320여 만, 소련 250여 만 명에 비하면 초라한 숫자였다. 쓸 만한 과학자는 1200명 정도, 거의가 국민당이 남겨 놓고 간 과학분야 종사자와 신중국 수립 전후 귀국한 과학자였다. 이들 중에는 국내외에 저명한 인물이 많았다. 장아이핑의 예상은 정확했다.

2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1차 핵실험 성공을 보고하는 장아이핑. 1964년 10월 16일 오후, 신장위구르자치구 뤄부보. [사진=김명호 제공]

2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1차 핵실험 성공을 보고하는 장아이핑. 1964년 10월 16일 오후, 신장위구르자치구 뤄부보. [사진=김명호 제공]

1964년 10월 16일 핵실험 현장지휘관 장아이핑은 새벽 3시 30분에 눈을 떴다. 6시 정각 기상처장의 보고를 받았다. “기상이 호전됐다. 아무 문제 없다.”

장아이핑의 보좌관이 일기를 남겼다. “뤄푸보(羅布泊)에 정적이 감돌았다. 새벽에 운반된 원자탄은 철탑에 안착 중이었다. 베이징의 총리 집무실에 암호 전문을 보냈다. 머리 단정히 빗고 전문 보내는 치우샤오제(邱小姐))의 옆모습이 아름다웠다. 원자탄이 제자리에 놓인 것을 확인하자 두 번째 전문을 보냈다. 치우샤오제에게 자리를 뜨지 말라고 지시했다. 나를 빤히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눈이 초롱초롱했다. 원자탄이 장착된 철탑은 가관이었다. 한 차례 둘러본 장아이핑이 입을 열었다. 통제실로 가자. 이날 처음 한 말이었다.”

출발 10m도 못 가서 장아핑이 차를 세웠다. 보좌관이 이유를 묻자 별일 아니라며 다시 출발시켰다. 훗날 보좌관이 정차 배경을 설명했다. “장군은 촬영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날도 원자탄 옆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려 했지만, 평소 부대원들에게 비밀 엄수와 촬영금지를 요구했던 탓에 포기했다.”

통제실에 좌정한 장아이핑은 폭발 단추 누를 대학생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며칠간 잠을 설치다  보니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역력했다. 장아이핑은 불안했다. 통제실을 지휘하던 국방위원회 부비서장 손에 기폭장치 풀 열쇠를 쥐어 줬다. 이때 총리 집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어떤 결과가 나오건 장아이핑이 직접 총리에게 보고해라.”

오후 1시 장아이핑은 60km 떨어진 관망대로 이동했다. 왕진창과 덩자센, 주광야(朱光亞·주광아)등 핵 과학자와 신장군구(新疆軍區) 지휘관, 위구르자치구 서기 등이 먼저 와 자리잡고 있었다.

15시 정각 치바오(起爆) 구령과 동시에 백광(白光)이 번쩍했다. 거대한 괴성과 함께 대지가 들썪했다. 불덩어리가 갈라지며 버섯 모양의 붉은 구름이 하늘로 치솟더니 서서히 우유빛으로 변했다.

핵 폭발 30초 후 장아이핑은 전화통을 들었다. 감정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방금 핵실험이 성공했다.” 총리 저우언라이는 침착했다. “핵 폭발이 확실한지 왕진창에게 확인해 봐라.” 장아이핑은 근처에 있던 왕진창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총리가 핵폭발이 맞는지 궁금해한다.” 왕진창은 표정이 없었다. 성공이라는 말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과학자들은 군인과 달랐다. 성공 여부를 함부로 단정짓지 않았다. 공병과 방화요원들로부터 “배치해 놓은 탱크와 군함이 종잇장처럼 꾸겨지고, 그 안에 있던 원숭이와 토끼들에게 변화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서야 성공을 확신했다.

두 번째 전화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하오(好)”를 연발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 국무원을 대신해 원자탄 제조와 실험에 참가한 모든 동지들에게 축하인사를 보낸다. 지금 주석은 인민대회당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즉시 달려가 보고하겠다.”

저우언라이의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냉정했다. “원자탄이 확실한지 상세히 조사해라.” 긍정적인 답을 듣고도 여전했다. “계속 관찰해라.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이다. 미국이나 소련이 우리가 핵 보유국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85년 봄 덩자센의 병세가 악화됐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쩐닝(楊振寧·양진녕)이 병문안을 갔다. 원자탄과 수소폭탄 유공자에게 국가가 지급한 상금 얘기가 나왔다. 덩자센의 부인이 10원(元)을 받았다고 하자 양쩐닝이 경악했다. “농담 그만해라.” 듣고만 있던 덩자센이 한마디 했다. “집사람 말이 틀렸다. 원자탄 10원, 수소폭탄 10원, 모두 20원 받았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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