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풀이된 민주당 경선 참사 … 배경엔 뿌리 깊은 계파 패권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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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경선 투표 결과가 유출되면서 그 후폭풍이 거세다. 당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홍재형)는 23일 긴급회의를 소집해 “투표 결과 유포와 관련한 범죄 행위가 드러나면 형사고발하겠다”며 진화에 나섰다. 양승조 의원을 위원장으로 한 진상조사위도 꾸렸다.

SNS 투표결과 유출 파문 #동교동계·친노·운동권 출신 등 #“당권 못 줘” 타 진영과 사활 건 싸움 #승리 위해 절차 소홀, 져도 승복 안해 #당 단톡방에 투표결과 올린 6명 확인 #안희정·이재명 “대부분 친문 인사” #문 측 “실수일 순 있어도 유포 무관”

이날 민주당 지역위원장이 사용하는 카카오톡 대화방에 최초로 투표 결과를 올린 6명이 확인됐다. 각각 수도권(1명)과 영남(4명), 호남(1명)을 지역으로 둔 원외 위원장이다. 안희정·이재명 후보는 “이들 대부분이 친문 인사”라며 수사 를 요구했다. 반면 문재인 후보 측은 “다른 캠프 인사까지 포함된 대화방에 결과를 올린 것은 실수일 순 있어도 유포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당내에선 “올 것이 또 왔다”는 반응이 나왔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파문은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잡음에는 이유가 있다는 지적이다.

◆민주화 운동권의 선민의식=민주당에선 ‘착신부대’라는 말이 보통명사처럼 통용된다. 착신부대는 다수의 전화회선을 한 곳에 모아 휴대전화로 착신전환한 뒤 여론조사에 응하는 조직이다. 응답률이 낮은 여론조사에서 미리 확보한 착신번호로 전화가 몰려오면 한 명이 수십 번의 여론조사에 응해 특정 후보를 집중 지원할 수 있다. 여론조사를 왜곡하는 이런 조작행위는 당연히 불법이다.

익명을 원한 당직자는 “일부 운동권 출신은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사고에 익숙해졌다”며 “자신의 승리가 옳기 때문에 절차나 과정상의 하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착신부대 역시 신종 선거기법 정도로 여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2012년 총선에선 통합진보당에 같은 방식으로 뒤통수를 맞았다. 서울 관악을 지역의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는 사무실에 전화 190대를 동원한 착신부대로 역공에 나섰다.

◆ 결과지상주의=국민의당이 분당해 나가면서 계파지형이 변하기는 했지만 민주당은 오래전부터 동교동계, 친노(친문), 재야, 386 운동권, 호남 관료그룹 등등의 어지러운 계파가 결합돼 있었던 정당이다.

복잡한 계보정치에 선민의식이 결합하면서 다른 진영에는 절대 당권을 넘길 수 없다는 패권주의, 결과지상주의를 낳곤 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선 정동영(현 국민의당) 후보 측이 선거인단 명부를 상자째로 실어 넘겼다는 ‘박스떼기’ 의혹을 받았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주민번호까지 도용돼 선거인단으로 등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대 총선을 앞둔 2012년 2월 26일 광주에선 자살 사건도 발생했다. 박주선(현 국민의당) 당시 후보 측은 공공기관인 동사무소 안에서 경선 선거인단을 대리등록 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현장을 급습한 선관위의 단속을 피하는 과정에서 용의자로 몰린 전직 동장이 투신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모바일 트라우마=이번의 현장투표 결과 유출은 잡음의 시작일 수 있다는 우려가 당내에 있다. 214만여 명이 등록한 선거인단 가운데 투표소를 찾아가서 하는 현장투표는 첫날 5만2886명에 불과했다. 대다수는 모바일(ARS)로 투표를 한다.

‘모바일 트라우마’가 바로 정당민주주의를 위해 민주당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민주당 경선은 2012년부터 기존의 전화에서 모바일로 진화했다. 모바일 투표는 신원 확인과 대리등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후보들은 수단 을 가리지 않고 경선인단 모집 경쟁을 벌이고, 패자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비노 진영의 김한길 전 의원과 친노의 이해찬 의원이 맞붙은 2012년 6·9 전당대회에서 김 전 의원은 대의원 현장투표에서는 전 지역에서 승리했다. 그러다 모바일 투표에서 뒤집혔다. 그해 대선 경선 도중 손학규·김두관 후보가 모바일 투표에서 열세를 보이자 경선을 보이콧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안, 문 향해 "대통령으로 미래 비전 없어”

이상일 아젠다센터 대표는 “당 선관위가 현장투표(22일) 결과를 첫 호남 경선이 열리는 27일까지 밀봉 상태로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을 각 대선후보 진영이 믿지 못했다”며 “경선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에 미리 투표함을 개봉하는 황당한 룰에 합의해 유출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안 후보는 이날도 광주를 방문해 "저에게 너무 벗어났다고 하는 어느 후보의 말을 들으면 화가 나기 전에 대통령으로 미래 비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문 후보를 비판했다.

강태화·유성운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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