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 골잡이를 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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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의 두 형사 박두만과 서태윤. 박두만은 현장에서 구른 경험을 통해 얻은 '감(感)'으로, 서태윤은 범행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범인을 추적한다. 두 형사는 비록 범인을 잡는데는 실패했지만, 독특한 두 캐릭터의 조화는 영화 흥행에 큰 힘이 됐다.

지금까지 골잡이를 평가한 이들이 누구인가. 전문가나 기자 혹은 팬들의 투표 정도였을까. 객관적 기록과 스탠드에서의 관찰.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지 않은가. 페널티라인 언저리부터 거칠게 몰아붙이는 골잡이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골키퍼의 느낌은 어떨까. 그들이 좁은 골마우스에서 느끼는 두려움, 긴장, 감탄. 12개구단 주전 골키퍼들이 그들만의 '감(感)'으로 골잡이들을 이야기했다.

▶누가 골키퍼를 감동케 하는가(올시즌)

주전 골키퍼 중 7명이 전북의 에드밀손과 마그노를 가장 인상깊은 골잡이로 꼽았다. '골키퍼가 볼을 막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한박자 빠른 슛과 돌파는 두렵기도 하지만 감탄의 대상이기도 하다. 광주의 이광석 골키퍼는 "에드밀손은 공을 참 쉽게 찬다. 확실할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지만 아니다 싶을 때는 돌아갈 줄 안다"고 말했다. 포항 김병지 골키퍼는 "마그노는 스스로 찬스를 만들어 골을 넣을 줄 아는 공격수"라고 평가했다.

토종 골잡이 성남의 김도훈과 울산의 최성국도 여러 표를 얻었다. 김도훈은 골키퍼들 사이에 전형적인 스나이퍼 스타일로 통한다. 뛰어난 위치선정과 높은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최성국은 '수비수를 한꺼풀 벗겨내는' 개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골키퍼가 골잡이와 1대1로 대면하는 순간. 골로 연결되든 안되든 그 순간은 골키퍼에게 가장 고통스런 시간이다.

▶누가 골키퍼를 감동케 하는가(선수 생활 통틀어)

지금부터는 개인적인 차이가 크다. 선수마다 경력이 재 각각이기 때문이다.

자를 대고 그은 것 같은 노상래의 슛팅 궤적을 기억 속에 선명히 담고 있는 골키퍼들이 많았다. 울산의 서동명도 그 중의 하나다. "프리킥 상황이었고 상래형이 볼 앞으로 다가왔죠. 그리고 심판이 휘슬을 부는 바로 그 순간 이미 볼은 골망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어요. 막아보지 않으면 그 위력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요즘처럼 감아차는 프리킥이 아니예요." 안양의 신의손 골키퍼는 "노상래는 슛팅뿐 아니라 개인기, 쇼맨십도 훌륭한 선수다. 그는 훌륭한 재능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다"며 노상래를 치켜세웠다.

전남의 박종문 골키퍼는 96, 97시즌을 한국에서 보낸 우크라이나 용병 스카첸코를 꼽았다.박종문은 스카첸코의 플레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 선수가 있기에 지지 않는다"는 말이 자연스레 이해됐다고 한다. 스카첸코는 프랑스의 FC 메츠를 거쳐 우크라이나의 CSKA 키에프에서 뛰고 있다.

대전의 최은성 골키퍼는 "골키퍼의 생각을 정확히 읽어 내는 듯한 황선홍의 플레이는 그 어떤 선수보다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김도훈과 고정운이 인상적인 골잡이로 이름을 올렸다.

▶가장 위협적인 골잡이

인상적이라거나 훌륭하다는 평가와 '위협적이다. 신경쓰인다'는 말은 분명 다르다. 가장 위협적인 선수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인상적인 선수와는 다른 이름을 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선수 생활을 통틀어 가장 위협적인 골잡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색다른 대답들이 쏟아졌다.

수원시절 전성기를 구가하던 샤샤는 많은 골키퍼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부천의 한동진 골키퍼는 "샤샤는 타고난 킬러다. 많이 뛰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먹이를 낚아채듯 볼을 향해 돌진한다"고 말했고 전북의 이용발은 "골키퍼마다 골을 많이 허용하는 선수가 있다. 나에겐 샤샤가 그런 존재"라며 아픈 기억을 더듬었다.

이 밖에도 90년대 초에서 중반까지 포항의 공격축구를 이끌었던 라데와 황선홍도 위협적인 골잡이로 골키퍼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신의손은 "라데는 힘과 기술, 그리고 슛팅력까지 겸비한 가장 위협적인 선수였다"고 평가했다. 현재 라데는 차두리가 지난 시즌까지 뛰었던 독일의 아르메니아 빌레필트에서 뛰고 있다.

박종문 골키퍼는 "유난히 이동국(광주)에게 골을 허용할 때가 많다. 특히 이동국이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꼭 나를 상대로 골을 뽑아내 돌파구를 찾곤 한다"며 '개인적'인 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성남의 김해운 골키퍼도 이동국의 골 결정력을 높이 평가하며 "정말 위협적인 선수"라고 말했다.

▶골잡이보다 위협적인 미드필더

절묘한 패스.정확한 슛팅능력.뛰어난 돌파력. 유능한 공격형 미드필더가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그래서 골키퍼들은 공격에 적극 가담하는 미드필더를 향한 경계의 눈초리를 놓치 않는다.

골키퍼들은 안양의 신태용.이기형.이성남, 대전의 이관우를 위협적인 미드필더로 꼽았다. 신태용은 탁월한 킥능력과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끊임없이 상대 골키퍼를 괴롭힌다. 이기형은 폭발적인 슛팅으로, 이성남은 저돌적인 돌파력으로 문전을 위협한다.

2003 올스타 최다득표를 획득한 이관우에 대해서도 골키퍼들은 후한 점수를 줬다. 올시즌 2골-3도움으로 기록은 뛰어나지 않지만 "정말 볼을 잘 차는 선수"라고 많은 골키퍼들이 지적했다.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항간의 평가가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패스에 능한 성남의 윤정환, 교토 퍼플상가의 고종수 등도 기억에 남는 미드필더로 꼽혔다.

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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