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당신] 1㎜ 오차도 없다, 세계서 인정받은 뇌종양 수술 권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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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탐방 분당차병원 김한규 교수
신경외과 의사는 의학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다. 위험하지 않은 수술이 없다.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이 없으면 치명적인 뇌 손상이 남는다. 환자의 생명뿐 아니라 삶의 질까지 신경외과 의사 손끝에 달려 있다. 분당차병원 김한규 교수는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그래서 위험부담이 가장 큰 종양을 제거하는 의사다. 뇌수술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두개저 수술’의 권위자다. 내로라하는 병원에서도 포기한 뇌종양 환자들이 그를 만나 새 삶을 찾는다.세계 무대에서 더욱 인정받는 김한규 교수를 만났다.

지난 16일 분당차병원 김한규 교수가 뇌종양 환자를 수술하고 있다. 뇌 깊은 곳의 종양을 떼어내는 그의 수술 실력은 세계에서도 손꼽힌다. 프리랜서 김정한

지난 16일 분당차병원 김한규 교수가 뇌종양 환자를 수술하고 있다. 뇌 깊은 곳의 종양을 떼어내는 그의 수술 실력은 세계에서도 손꼽힌다. 프리랜서 김정한

대구에 사는 최재영(53·가명)씨는 2년 전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그 역시 칼을 잡는 외과의사였지만 진단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동료 의사는 그에게 뇌 가장 깊은 곳인 뇌하수체에서 시작된 종양이 얼굴까지 퍼진 상태라고 했다. 최씨는 유명 병원은 모두 찾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한 의사의 추천으로 김한규 교수를 만났다. 반쯤 체념한 그에게 김 교수는 수술해 보자고 했다. 수술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예후는 굉장히 좋았다. 하루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최씨는 나흘이 지나 퇴원했다.

모든 병원서 포기한 환자, 그를 만나 살아나

김 교수가 만나는 환자 대부분은 다른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크고 어려운 케이스만 모인다. 뇌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뇌간에 종양이 생기면 방법은 두개저 수술뿐이다. 이 수술법이 나오기 전까지 뇌간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땅(No Man’s Land)’으로 불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로봇수술이나 감마나이프 같은 최신 수술법은 정밀도 면에서 아직 인간의 손을 따라잡지 못한다.

두개저란 두개골의 안에 뇌를 떠받치는 접시 같은 판을 말한다. 두개저 수술은 이 울퉁불퉁하고 얇은 판 사이로 통로를 만들면서 종양에 다가가는 수술법이다. 기존 수술법은 두개골 바깥쪽에 구멍을 내고 뇌를 당기고 젖혀가며 수술도구를 종양까지 밀어넣어야 했다. 당연히 크고 작은 뇌 손상이 발생했다. 그렇다고 두개저 수술이 더 안전한 것만도 아니다. 얇은 판 사이로 호흡중추·경동맥·감각신경·운동신경 등 주요 혈관과 신경이 지난다. 이를 건드리지 않고 길을 만들어야 한다. 조금만 어긋나 신경을 건드리면 장애가 남고 숨골이나 혈관을 건드리면 사망한다. 그래서 통로를 내는 작업은 매우 섬세하면서도 힘겨운 싸움이다. 수술 시간의 절반 이상이 길을 내는 데 소요된다. 12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만큼 결과는 좋다.

두개저 수술이 후유증이 거의 없고 회복이 빠른 이유는 뇌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병원에서 포기했던, 심하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들었던 환자가 수술 후 하루 만에 일반 병실로 옮겨져 건강히 지내는 상황은 전문가조차 믿기 힘든 일이다. 김 교수는 “여기(분당차병원)로 옮겼을 때도 의료진들이 처음엔 회복 속도를 믿지 않았다”며 “하지만 실제 환자가 하루 만에 일반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나서는 전부 고개를 끄덕인다”고 전했다.

일본 질투한 젊은 의사, 20년 만에 권토중래

그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는 34년 전을 떠올렸다. 학회 참석차 일본에 갔을 때다. 당시 한국 신경외과 분야는 태동기였다. 반면에 일본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었다. 실력의 차이를 직접 확인한 김 교수는 “일본을 따라잡기 전까지 다시는 일본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력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기회가 찾아왔다. 동료 교수 한 명이 미국 연수 경험을 들려줬다. 두개저 수술의 개념을 처음 접했다. 그는 당시의 느낌을 “환상적이었다”고 표현했다. 배울 곳을 수소문했다. 당시 미국 UCLA가 두개기저부 연구소를 운영 중이었다. 마침 인연이 있는 의사가 연구소의 책임자였다.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선교사로 전주예수병원에 머물렀던 취담(Cheatham) 박사였다. 김 교수는 같은 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으며 6개월간 그와 가깝게 지낸 터였다. 당장 편지를 썼다. 취담 박사로부터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답장이 왔다. 즉시 짐을 싸서 건너간 뒤 1년간 수많은 수술법을 배워 손에 익혔다. 한국과는 달리 해부실습용 시신 기증이 많은 곳이라 밤낮없이 연습할 수 있었다. 연습은 지겨울 정도로 반복했다. 행여 잊을까 사진을 찍었다. 돌아올 땐 사진이 3000장이 넘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그는 자신감에 넘쳤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첫 수술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김 교수는 “다행히 별 탈 없이 수술을 마치긴 했지만 실전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첫 수술에서 느낀 당혹감은 그에게 피와 살이 됐다. 김 교수는 그 후로 수술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한 시간 넘게 모의수술을 진행한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만만한 수술이 없었다”며 “수술 전부터 자만하면 100% 탈이 난다”고 말했다.

칼은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던가. 이런 꾸준한 연습에 언젠가부터 그의 손기술을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2년 미국 애리조나에 위치한 배로(Barrow) 신경외과학연구소에서 그를 초빙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수술 병원에서 수술 시연과 강의를 했다. 2005년엔 일본신경외과학회에서 그를 초청했다. 20년 전 젊은 전문의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바로 그곳에서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김 교수는 “20년 만에 일본을 따라잡았다는 생각에 너무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김한규 교수 약력
미국 UCLA 교환교수
대한두개저외과학회 회장
대한뇌혈관외과학회 회장
세계뇌혈관학회 상임이사
한·일뇌혈관외과학회 회장

김진구 기자 kim.jin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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