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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아킬레스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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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면

VIP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중앙SUNDAY 편집국장 이정민입니다.

[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저의 상식에 따르면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 개혁 개방은 필수적입니다. 중국에 오래 체류하면서 중국의 발전상을 직접 보고 체험했습니다. 북한은 강성대국으로 가고 있다고 자처합니다. 북한이 말하는 강성대국이란 사상적·군사적·경제적 강국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상은 보이지 않으니 강하다면 강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군사는 핵을 가졌으니 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경제는 숫자에 의한 과학입니다. 지금 북한의 경제 실정을 두고 경제 강국에 도달했다고 외칠순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사상적으로 강하고 군사적으로 강하니 주민들에게 더는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주문할 명분도 없어 보입니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얼마전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당한 김정남입니다. 150통의 이 메일을 주고 받았고 실제 마카오에서 인터뷰까지 했던 일본 언론인 고미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 편집위원과 주고 받은 대화중 한 토막입니다. 김정남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적대국 언론과 만나 북한의 개혁 개방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조국에 대한 충성이자 애국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인터뷰는 김정은으로의 후계 구도가 공식화된 2011년 이뤄졌는데,고미 위원은 김정일 사망(2011년 12월)직후인 2012년 1월 그간의 이 메일과 인터뷰 등을 묶어 책(『안녕하십니까 김정남입니다』,중앙 m&b)으로 출판했습니다.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면,김정남의 비판이 이복동생에게 권좌를 빼앗긴 장남의 넋두리로만 넘길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동생이 후계자로서 북한 주민을 윤택하게 만들어주길 진심으로 바라는" 절절함이 곳곳에서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개혁 개방에 대한 신념은 역설적으로 그가 북한의 3대 세습 지도자가 되는 데 치명적 결함으로 작용했습니다. 김정남 자신도 "제가 완전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해 북한에 돌아간 때부터 부친께선 저를 경계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을 정도니까요. 자식들이 국제적 감각을 갖추기를 원해 해외 유학까지 시켰으면서도,한편으론 자본주의에 물들어 체제가 위협받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느낀 김정일의 공포심이 길항작용을 일으켜 결국 '괴물' 김정은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문득 김정남의 운명이 어쩌면 조선조 소현세자의 운명과 빼닮았다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인조의 친명(親明) 사대정책에 반기를 들다 의문사한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 말입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의 치욕적 패배로 세 아들을 청나라에 볼모 잡히는 신세가 됐지요. 그중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은 8년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는데,이 기간동안 소현세자가 서양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접하고 발전된 서양의 문물과 과학 문명을 적극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던데 반해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反淸)주의자가 돼버렸습니다. 명은 '지는 해',청은 '뜨는 해'였으니 소현세자의 세계관과 시대 인식이 더 적절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단지 세자에게 임금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소현세자를 박대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만약 그때 봉림대군이 아닌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라 서양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고 부국강병책을 썼더라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만약 김정은이 아닌 김정남으로의 이양이 이뤄졌더라면 북한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부질없는 공상에 이르렀을 때,다시 냉혹한 현실과 맞닥뜨립니니다. 고모부 장성택에 이어 이복형 김정남까지 해치운 김정은 정권은 말레이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 끝에 말레이에서 체포된 암살 용의자 이정철을 기소없이 추방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소식입니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역사의 미스테리로 남았듯이 김정남의 독살 역시 북한의 소행이란 심증만 있을뿐 물증 없는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 것이죠. 인조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 나머지 개혁론자인 소현세자를 제거했듯이 김정은 역시 체제를 공고히하기 위해선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멈추지 않을 것이란 점 역시 명확해 보입니다.
 김정은의 포악성과 잔인함을 다시 한번 드러낸 이번 사건으로 세계는 경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잔인한 군주 김정은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는 그 잔인함 뒤에 드리워진 김정은의 공포를 읽을줄 알아야 합니다.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한 김정은에게 위협이 되는 건 북한내 싹트는 자본주의적 요소일 것입니다. 장마당 없이는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경제,중국에 더 예속돼가는 무역 구조,거기서 큰 돈을 챙긴 돈주들의 등장,그리고 이들과 고위층의 결탁..이는 북한 사회가 안고있는 구조적 모순이면서 동시에 김정은에겐 아킬레스건이기도 합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시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빠르면 5월,새 정부가 탄생할 수도 있습니다. 예행연습 없이 임기를 시작할 새 정부는 곧바로 김정은을 대적해야 하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다음 지도자가 되겠다는 주자들은 지금쯤 '김정은 사용법'을 숙지하고 이에 맞서는 새로운 전략을 다듬고 있어야 하는게 정상입니다. 여야,진보 보수를 떠나 '핵 보유국 북한'을 다룰 전략과 '김정은의 아킬레스 건'을 겨냥한 새로운 대북 정책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야당이 집권하면 북한에 현금을 퍼줄 것"이라거나 "실패한 가짜 안보세력의 안보장사" 운운하는 낡은 레퍼토리는 수명을 다한 이념 장사일 뿐입니다.

 #정치의 사법화가 부른 불복의 광장,사법의 정치화를 낳다
 이번주 중앙SUNDAY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광장의 대치'를 '정치의 사법화'란 앵글로 분석했습니다. 정치권이 정치적으로 풀어야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헌재나 법원이라는 법의 심판으로 가져가는 정치의 사법화는 87년 민주화 이후 되풀이되고 있는 한국정치의 후진적 병폐입니다. 갈등이 큰 사안일수록 오랜 토론과 타협이라는 공론 과정을 통한 여론 숙성을 거쳐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승복하는 문화와 민주적 질서를 학습하게 되기 때문에 토론과 타협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토론과 타협 대신 종종 법정을 택합니다. 국민의 선출에 의하지 않은 사법 권력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고 불복하는 기형적 문화가 어느덧 넓게 자리잡게된 것이지요.
 이번 박 대통령 국정농단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건 초기,정치권은 책임총리제,정치 원로들이 제안한 4월 하야,6월 대선 등 정치적 타협과 토론을 통해 해법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걷어차고 사법부로 몰고 갔습니다. 정치가 해야 할 임무와 책임을 헌재로 떠넘겨버린 것입니다. 광장의 대치가 가팔라지고 초기와 달리 여론도 평행선을 달리자 정치인들은 극한 발언을 쏟아내며 광장의 분열을 부채질합니다.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해 헌재에 결정해달라고 떠넘겨놓고서 그 결정에 대해 불복하겠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토해내는 정치인과 대선 주자들의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정권을 다 잡은 양 으스대던 야당은 특검 연장법 처리가 무산되자 결국 불발되긴 했지만 황교안 권한대행을 탄핵하겠다는 협박 발언을 하는등 자중지란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정치의 사법화는 건강한 담론의 장을 만들어내지도 못할뿐 아니라 몽테스키외가 주창한 3권분립의 정신에도 어긋납니다. 나아가 사법부를 자신의 입맛대로 요리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사법의 정치화라는 또다른 부작용도 만들어내고 있지요.
 헌재의 탄핵 심판을 앞둔 마지막 집회가 내일(4일) 열립니다. 중앙SUNDAY는 광장에서 표출되는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오늘 한국 정치가 직면한 정치의 사법화의 문제를 독자 여러분들과 진지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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