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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개헌으로 ‘제왕적 대통령’이 없어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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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박원호서울대 교수·정치학

대통령이 국회에 의해 탄핵되고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지금,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지적되는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다. 1987년 민주화 이래 모든 대통령이 예외 없이 친인척과 측근 비리로 조사받은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대통령이 마치 전제군주처럼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좌우할 수 있다는 데 기인한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헌법 자체는 ‘제왕적’이지 않아 #대통령이 마사회장·평검사 임명 #핵심적 문제는 관행과 문화에 #헌법 개정은 뇌수술과도 같아 #내각제도 분권제도 문제점 내포 #개헌 위한 토론과 설득이 필요

이것은 곧바로 개헌론으로 이어진다. 여러 개헌론이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는 있지만 대체로 요약하면 우리의 위계적인 정치문화가 대통령제와 만나 매우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제왕적 전제군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이번 박근혜 정권의 실정(失政)을 포함하여 모든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하는 방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개헌이라는 것이다.

최근 국회의 개헌특위가 대통령제의 ‘폐기’를 의결하고, 몇몇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개헌을 촉구하는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는다. 나 또한 한국의 헌법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신성불가침의 문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대통령제가 우리의 정치적 토양에 잘 맞지 않거나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맞지 않는 제도일 수도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헌법을 바꿈으로써 모든 문제가 일거에 사라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게으르고 순진한 태도이며,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니 일단 개정하자고 덤비는 것 또한 무책임한 태도로 보인다. 헌법을 개정하여 정치시스템을 재구성하는 것은 마치 국가의 뇌수술을 단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에 수반되는 예측하지 못했던 수많은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아직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해 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과연 우리의 헌법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행 헌법은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쟁취한 것이며, 해당 시기의 시대정신이 독재타도와 민주화였던 만큼 대통령의 권한이 일정하게 제약된 형태를 띤다. 헌법 조항의 순서로만 보면 국회가 행정부와 대통령을 앞서게 되었으며, 더 이상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없게 된 헌법이다. 오늘날 외국 여러 대통령제와 비교해도 우리 대통령의 권한이 특별히 막강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역대 대통령들이 ‘국회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불평하던 그 헌법이다. 특히 두 명의 대통령이 실제로 의회에 의해 탄핵안이 가결된 헌법이기도 하다. 이것을 ‘제왕적 대통령제 헌법’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 대통령제의 ‘제왕성’은 헌법이 아닌 영역에 있다. 예컨대 헌법은 대통령이 여러 헌법기관 고위직을 임명하는 것을 정의하고 있지만 국회의 동의나 청문 과정이 필요한 제한된 인사권이다. 정작 대통령이 지닌 인사권의 핵심은 헌법이 아닌 법률이나 시행령 등에 의해 규정된 약 3000명 이상의 행정부 고위 공무원과 직속위원회 위원, 공기업, 준정부기관, 공공기업 기관장 등에 행사하는 인사권일 것이다. 요컨대 대통령의 ‘제왕성’을 견제하는 일은 헌법이 아니라 대통령이 한국마사회장과 일반 평검사까지 직접 임명하게 돼 있는 구조에 의문을 던지면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은 법령의 수준에서 정의된다기보다 우리의 관행과 문화에 더 깊이 침투돼 있다는 것이 정확한 서술일 것이다. 청와대가 국공립 대학의 총장이나 민영화된 기업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권(大權)’이라 부르고 후보들을 ‘잠룡’이라 부르는 문화 속에 이미 녹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개헌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 속의 권위주의를 반성하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잘못된 관행들을 찾아내고 바로잡는 일일 것이다.

내각제 개헌을 하면 당연히 ‘제왕적 대통령’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훨씬 강력한 ‘제왕적 총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분권형제 개헌을 이야기하지만 대통령과 총리라는 두 ‘제왕’ 사이의 갈등 조정에 대한 대안은 있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대안들이 반드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헌법만의 문제가 아닌 법령과 제도와 관행의 문제이며, 보다 긴 호흡과 여유를 가지고 토론하고 설득하고 고민해야 할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위기의 시간에 개헌이라는 이슈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