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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안보 대통령’의 자질과 철학을 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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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문정인연세대 명예특임 교수

문정인연세대 명예특임 교수

‘안보 대통령’ 논쟁이 뜨겁다.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와 김정남 피살사건을 계기로 안보 문제가 다가오는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대두되면서다. 보수 성향 대선 후보들은 모두 자신이 안보 대통령의 적임자라고 자평하고 나섰다. 그들이 내걸고 있는 처방은 다양하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조속한 배치 혹은 추가 도입, 국방비 증액, 한국형 미사일방어 체계 구축 조기 완료, 첨단 전투기 개발, 심지어 ‘안보 증세’와 핵무기 보유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상투적이고 고비용 안보대책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왠지 시큰둥해 보인다. 이는 지난 10년간 ‘안보는 보수’라는 기치를 들고 국정 운영을 했던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초라한 성적표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군사력, 한·미동맹 강화로만 #쉽게 안보대통령 될 수없어 #국방 분야 대비책에 더해 #경제, 생태, 인간안보 묶어낼 #지혜와 전략적 포석 갖춰야 #부처 간 시스템 관리도 핵심

까놓고 말해 보자. 군사력을 증강하고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것만으로 국가의 안전이 담보된다면, 그러한 공약만으로 ‘안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쉬운 과제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안보 대통령은 그 이상의 지혜와 자질, 안보관을 필요로 한다. 안보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을 한눈에 조망하는 큰 그림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안보란 무엇인가. 국가의 생존·번영·품격이라는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를 보호하고 극대화하는 일이다.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도 군사 안보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 없는 이유다. 국방 분야의 대비책과 더불어 경제와 생태, 사회와 인간 안보를 한데 묶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급변하는 지정학·지경학적 맥락을 읽고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전략적 포석을 설계함은 물론 역사의 큰 흐름 위에서 유권자들의 여망을 접목해 국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국가 안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특히 어느 틈엔가 우리 안에 운명처럼 자리 잡은 ‘강대국 결정론’이라는 족쇄에 머무르지 않고 생존·번영·국격의 새 지평을 열 수 있는 안보 대통령이야말로 국민의 요구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례는 매우 유용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아닐 수 없다. 존경받는 안보 대통령이 되려면 편견이나 억측, 고집으로 점철된 경직된 판단, 충동적 대응을 피해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한반도라고 다를까. 북한의 위협이나 도발이 있을 때마다 대북 응징, 한·미 동맹, 국제 공조 같은 메시지만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대통령이 창의적 돌파구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철마다 반복돼 온 북한 붕괴론에 매달려 시간만 축내는 정부는 더욱 금물이다. 타성에 젖은 수세적 처방만 내놓는 대신 변화하는 안보 환경에 유연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대처할 수 있는 실천적 지도자,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필요로 하는 ‘안보 대통령’의 모델일 것이다.

국가 안보는 고도의 종합 판단과 시스템 관리 능력을 요하는 국정과제다. 관료정치의 적폐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외교부·국방부·통일부·국가정보원 등 관련 부처들은 늘 국익 우선을 외치면서도 실상은 부처 이기주의와 관료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종합적 처방보다 특정 부처의 독주로 남북 관계가 한계에 봉착하고 결과적으로 한·중 관계도 어려워지고만 박근혜 정부의 안보정책은 그 대표적 사례다. 대승적 관점에서 국익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견제와 균형을 통해 부처 간 갈등과 대립을 조화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 관리 능력이야말로 안보 대통령의 핵심 자질인 이유다.

보다 근본적인 덕목으로는 안보 철학을 들 수 있다. 국가 안보의 핵심은 국민이 외부 위협에 구애받지 않고 안심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안보를 공기처럼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지도자의 책무다. 현대 정부의 안보정책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같은 재앙을 사전에 예방하고 안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앙 최소화, 안정 최대화’라는 원칙을 안보관의 중심에 놓는 최고지도자의 철학이 중요하다. 안보 포퓰리즘의 덫에서 벗어나 안보 현안을 사려 깊게 다루는 예지는 이러한 철학 위에서만 나올 수 있다. 설득력 있는 논리와 언어로 유권자·정치권·언론·시민사회와 소통하며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 역시 이 같은 철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흔히 경제는 망가져도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의 기회를 엿볼 수 있지만 안보는 한번 무너지면 국가의 생존과 번영, 위신이 송두리째 사라진다고 말한다. 경제 대통령보다 안보 대통령이 더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국내 정치 혼란과 국제 정치 위기가 무쇠처럼 엉켜 있는 시점에 치러지는 이번 대선에서 자질 있는 ‘안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깨어 있는 유권자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법이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