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소통과 화합이라는 진부한 상식을 되새기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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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기현서울대 교수·철학과

김기현서울대 교수·철학과

보통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원이 제한돼 있고, 사람들이 이기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이 무한히 공급되는 세상이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인간이 이기심을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사람들이 어떤 삶의 모습을 꾸려 나가는가는 결국 서로 간에 상충된 이해를 어떻게 조율해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 사회는 문명의 외양을 한 야만의 상태 #소통과 화합의 비전 제시하는 지도자 찾아야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는 제도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채 자연적 본능이 충돌하는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고 불렀다. 다행히도 인간은 이기적 본능을 적절히 통제해 야만 상태를 벗어나 공존의 시스템을 갖추는 방향으로 지혜롭게 발전해 왔다. 홉스에 따르면 언제든 약자로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성찰이 서로 간의 합의에 의해 국가라는 제도를 만들어 야만 상태를 벗어나게 도왔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물리적으로 약한 인간이 자연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신화 또는 종교를 통해 공동체 규범을 만들면서 협력이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해를 타인의 이해와 조율해 화합하고, 조율의 틀을 제도화해 질서를 따르는 것은 개인적 덕성으로 칭찬받을 일일 뿐 아니라 인간이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 공동체를 이루어 생존하기 위한 실천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외양은 문명의 모습을 갖고 있으되 그 내용은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어린이를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성찰 없이 그때그때의 인기영합적인 표몰이를 위해 만들어진 보편적 복지정책은 유아들이 부모와 보내는 시간을 빼앗아 부모의 모습을 보며 규범을 익힐 기회를 빼앗아 간다. 결과에 의해 평가받는 무한경쟁의 적자생존 문화가 지배하는 초등·중등 교육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서로의 욕구를 조절하는 절차와 과정의 중요성을 배우지 못한다. 규범에 의해 정련되지 않은 탐욕과 충동으로 무장해 사회에 나온 개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과 연대할 뿐 다른 집단과의 관계는 적대적 투쟁관계로 해석한다. 사회제도는 대립을 조율하는 기능을 상실한 채 대립의 소용돌이에 함몰돼 간다. 한국 사회 갈등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며, 갈등으로 인해 한 해 최대 246조원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삼성경제연구소의 2010년 보고가 놀랍지 않다.

공동체적 규범의 쇠락, 사회적 제도에 대한 존중의 결여와 그에 따른 기능 상실, 다면적인 계층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며, 혼란기인 지금 그 양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권력의 정점에서 탈법이 행해지며, 정치적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을 향한 인신공격과 거짓 뉴스가 횡행하고, 헌재 앞에서 태극기가 흔들리고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일부 세력은 다중의 표를 얻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소외감에 호소해 사회적 갈등을 부추긴다.

우리가 야만 상태를 벗어나 진정한 문명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결국 기본이 회복돼야 한다. 그 기본은 문화에 있다. 창조경제 운운하며 한류를 어떻게 확장시킬까를 이야기하는 그런 공연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해에 함몰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합의를 이끌어 내는 상호존중의 소통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의 기반 위에서만 우리는 삶의 방식의 공통 분모를 도출하고, 그 삶의 방식을 제도로 구현하고, 제도를 존중하며 조화롭게 갈등을 조율하며 살 수 있다.

상호존중의 소통 문화를 위한 외침은 상식적인 소리다. 문제는 이런 건강한 상식의 회복을 요청하는 소리가 진부하다, 생경하다, 순진하다는 냉소를 받을 만큼 우리 사회가 분파적 갈등 구조 속에 길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하며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권력 이양기에 들어선 이 시점에 우리는 누가 특정 집단의 이해에 영합하는 달콤한 공약을 내세워 분열을 가중시키는지, 누가 우리 사회의 갈등의 문제를 직시하며 다양한 이해집단 사이의 소통과 화합의 비전을 제시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한다.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