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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만 바꾸면 만사형통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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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채인택논설위원

채인택논설위원

서구 사회가 올해도 심상치 않다. 지난해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 국민투표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 놀랄 일을 주도했던 ‘대중의 바람’이 여전히 거세다. 3월 15일 총선이 열리는 네덜란드에선 극우 자유당의 헤이르트 빌더르스 대표가 지난주 “네덜란드 거리를 불안하게 하는 모로코인 쓰레기를 치우겠다”는 증오의 막말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시민을 나와 남으로 나누고 남으로 분류된 대상을 차별하고 저주하는 분열주의·차별주의·증오주의의 ‘극우 삼박자’를 갖췄다. 유럽에서 가장 관용적이고 개방적이라던 나라에서 ‘거리의 대결’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 실정 낳은 헌법·관행 근본 수술 없이 #사람만 바꾼다고 비정상적 권력파행 치유될까

4~5월 대선(1차와 2차 결선투표)이 있는 프랑스에선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 지지율 1위다. 전통의 정치세력인 좌우파 후보들은 줄줄이 흠결이 드러나 지지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르펜은 이민자 추방과 유럽연합(EU) 해체를 주장한다. EU 창설 주도국 인 프랑스에서 ‘자기부정적’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으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9월 총선이 치러질 독일에서도 반난민·반이슬람을 앞세운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약진하고 있다. 독일은 유대인·집시 등에 대한 나치의 증오라는 ‘국가범죄’를 반성하면서 유럽의 존경받는 나라로 변신했다. 그런 나라에서 극우세력이라니.

이 모두가 “이게 나라냐”라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지 출신의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의외로 별로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의아해서 이야기를 청해 들어보니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정치 시스템이다. 프랑스의 경우 전통의 결선투표 제도가 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은 후보가 나오지 않으면 1, 2위 후보끼리 결선투표를 한다. 극단주의를 배격하는 대부분의 유권자는 여기에서 극우후보를 배제하는 전략적 투표를 한다.

이런 현상은 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 처음 생겼다. 1차 투표에서 우파의 자크 시라크가 19.88%로 1위, 극우파 장마리 르펜이 16.86%로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결선투표는 의외로 싱거웠다. 득표율에서 시라크가 82.21%를 기록한 반면 르펜은 17.79%에 그쳤다. 좌우파는 서로 상대를 존중하며 극우파를 막기 위해 손을 잡았다. 르펜은 확장성이 고갈된 ‘찻잔 속의 폭풍’임이 증명됐다. 결선투표가 있기에 올해 극우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다는 게 프랑스 친구의 전망이다.

의원내각제인 네덜란드의 경우 19세기 이래 1개 정당이 정권을 독식한 적이 없는 독특한 정치적 풍토가 있다. 따라서 어차피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하는데 연정협상 과정에서 막말이나 증오의 정치가 배제되거나 희석될 수밖에 없다는 게 네덜란드 친구의 주장이다. 지나치게 희망적인 게 아니냐는 질문에 “정치도 자동차처럼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 안전벨트와 에어백을 모두 마련해야 한다”며 “네덜란드 정치에는 그런 장치가 다양하게 달려 있으니 희망은 몰라도 절망적이진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독일 친구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내일로 박근혜 대통령 취임 4주년을 맞는다. 탄핵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라 아무도 축하하지도, 기억하지도 않는 음산한 기념일이다. 하지만 미래에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거에서 철저히 배워야 한다. 지난 4년의 문제점을 철저하게 따져 정치와 권력의 제도를 손봐야 하는 이유다.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인물인지, 예산을 사용해 추진할 정책이 국민과 공동체를 위한 것인지,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존중하면서 국정운영을 할 것인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오늘날 이런 사태를 겪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헌법·법률·제도·관행을 철저히 고쳐 재발을 막는 노력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대선주자들을 보면 그런 고민보다 당선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달리 말하면 박 대통령이 가졌던 권력을 자신이 가지면 더 잘 쓸 수 있다는 이야기만 하고 다니는 셈이다. 법과 제도를 그냥 두고 대통령만 바꾸면 만사형통인가. 헌법과 관행을 뜯어고쳐 제대로 된 민주국가를 만들겠다는 도전 의식으로 국민 곁에 다가서는 후보를 갈망한다.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