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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대통령이 아프니까 나라도 아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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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일 때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그쪽 사람이래. 조심스럽게 정신과 의사인 내 인척에게 대통령 치료를 좀 부탁하려 한다고 하더라고.”

박 대통령 당선인 때 트라우마로 정신과 치료 타진 #노무현, 2004년 탄핵 때 ?통치 명분 잃었다?고뇌

무슨 치료를?
“당선인이 청와대에 안 들어가려 한다는 거야. 부친이 궁정동 안가에서 숨져 청와대 트라우마가 많잖아. 전문가 치료가 필요하다고 봤던 거겠지.”
그래서?
“다른 건 다 좋은데 비밀이 지켜질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조금 있다가 없었던 일로 해달라며 전화를 끊더라고.”

4년이나 지난, 다소 충격적인 얘기를 지금 하는 이유에 대해 그 법조계 인사는 “미친놈 소리를 들을까봐 어디다 말도 못했다. 그때 제대로 연결을 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요즘 들어서…”라고 답했다. 이어 “트라우마란 정신적 아픔, 즉 마음의 병을 말한다. 그래서 계속 해외로 나가고 관저에 오래 머물고 장관 서면보고만 받았던 것 같다. 뭔가에 짓눌려 있던 박 대통령에게 자신감 넘치는 최순실의 조언과 조력은 형제자매보다도 더 큰 힘이 됐겠지”라고 분석했다.

생각하건대 최순실씨가 청와대에 기 치료 및 주사 아주머니를 자주 대동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길라임’이란 가명으로 차움의원의 종합영양제 주사를 맞은 것 등도 치료 목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픈 걸로 치면 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운명’이 닮았다. 부모 횡사의 아픔을 겪은 미혼의 첫 여성 대통령과 결벽 성향의 고졸 변호사 출신 첫 대통령은 권력의 끝자락 역시 똑같이 드라마틱했다. 노 전 대통령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 박연차(태광실업 회장)도 어찌보면 ‘비선 실세’였다. 위세만 부렸지 국정 농단에 개입하지 않은 것은 최씨와 달랐지만.

그래, 맞다. 박 대통령은 아픈 것이다. 아프지 않고서야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수수방관할 수 있을까. 물론 국가 대사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대부분 헌재로 가져오는, 무능의 극치인 정치권의 단견에도 책임은 있다. 박 대통령의 잘못은 한둘이 아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사유로만 본다 해도 433억원대 뇌물수수 혐의자다. 최씨에게 국가 기밀을 열람케 하고 국정 농단권을 준 것은 상식에도 반한다. 약속을 지키던 원칙주의자 모습도 온데간데없다. 오로지 권좌에서 끌어내려지는 모멸의 순간을 모면해 보려는 욕심만이 보인다.

대통령이 아프니 나라가 아프다. 국민들의 슬픔은 병인 양 깊어간다. ‘헌재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서 촛불과 태극기 진영으로 갈라져 광장에 선 시민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선전포고만 없을 뿐이다. 헌재 결정에 대한 불복 선동은 우려된다. “내란” “아스팔트에 피”에 이은 김평우 변호사의 “조선시대도 아닌데 복종하라면 복종해야 하는가. 우리가 노예인가” 발언에는 피가 묻어 있다. 금도를 넘어섰다. 헌재는 국민이 합의한 헌법의 명령을 수행하는 공적 기관이다. 복종·굴종이 아니라 합의된 정의에 따르는 것으로, 국민의 의무다.

광장에 모여 무엇을 외치든 자유다. 하지만 월드컵 축구나 대통령 선거 때마다 보듯이 아무리 아쉽고 안타까워도 심판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복의 나라에 미래는 없다.

27일의 탄핵심판 최종변론장이 박 대통령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할 마지막 승부처다. 출석해 헌재 선고 전 하야 일정을 밝힐 적재요, 적소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불출석을 결정했다. 설사 탄핵이 기각된다 해도 국민의 신뢰를 잃은 ‘식물 대통령’일 뿐이다. 시중에 떠도는 복귀 후 복수혈전 운운은 공허한 혀놀음이다. 지금은 대통령이 겸허히 자신의 통치 방식과 수단이 올바랐는지를 되짚어볼 때다.

“나는 권력으로 나라를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명분과 가치로 해 나가고 싶었다. 대선자금 문제 등으로 명분도, 가치도 다 사라졌다. 탄핵이 기각된다 한들 무엇으로 대통령을 하겠나?”(김병준 전 총리 내정자, 『대통령 권력』 중)

탄핵 정국 때 노 전 대통령은 이처럼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와 박 대통령이 다른 지점이 여기가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