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동생과 가이드 언니… 설원을 함께 누비는 자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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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아 선수(왼쪽), 정훈지 가이드

정훈아 선수(왼쪽), 정훈지 가이드 [대한장애인체육회]

"빨리 활주해!" "일어나!"

제14회 전국장애인겨울체전 크로스컨트리 경기가 열린 평창 알펜시아 바이애슬론경기장. 언니 정훈지(13)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따라 훈아(11)는 스키 폴을 힘껏 땅에 찍었다. 시각장애가 있는 동생 훈아와 비장애인 가이드 선수로 나선 훈지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자매는 "처음으로 출전한 대회에서 은메달을 2개나 따서 기분이 좋다"고 웃었다.

스키를 신고 설원을 달리는 크로스컨트리는 장애인들에게 딱 맞는 종목이다. 가파른 비탈을 내려오는 알파인 스키에 비해 위험하지 않아 입문자에게 알맞기 때문이다. 이번 체전에도 청각·시각·척수·상지·지적 장애 등 여러 유형의 장애를 가진 선수들이 출전했다. 크게 좌식·입식·시각, 세 경기가 열리는 노르딕 스키에서 가장 독특한 종목은 시각 장애 경기다. 다른 종목과 달리 장애인 선수를 앞에서 끌어주는 가이드와 함께 두 명이 레이스를 펼치기 때문이다. 먼저 달리면서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있는지를 알려주고, 평지에선 더 빨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체전은 물론 패럴림픽에서는 장애인 선수와 가이드 모두에게 메달을 수여한다.

일반적으로 가이드는 비장애인 선수 출신들이 맡는다. 하지만 최연소 출전자인 정훈아는 선수 경험이 전혀 없는 친언니와 함께 출전했다. 아버지 정성관(51)씨는 "골볼(시각장애인들이 하는 구기종목)을 훈아가 했는데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1월부터 스키학교에 보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힘들면 2주만 하고 그만둬도 좋다'고 했는데 더 하겠다고 하더라. 한 달 내내 붙어다닐 가이드를 구하기 쉽지 않았는데 훈지가 같이 하겠다고 해줘 안심했다"고 말했다.

정훈아 선수(왼쪽), 정훈지 가이드

정훈아 선수(왼쪽), 정훈지 가이드 [대한장애인체육회]

훈아는 시각장애 1급이다. 태어날 때부터 황반(눈 안쪽 망막의 중심부에 위치한 신경조직) 변성 질환을 앓고 있다. 정성관씨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을 잘 못 맞췄는데 다섯 살 때 황반변성이란 진단을 받았다. 빛과 형체 정도를 볼 수 있다. 황반변성을 앓는 사람들은 대개 전맹인데 그래도 훈아는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책도 볼 수 없어 크게 씌여진 확대도서를 보고, 수업도 크게 보이는 모니터를 설치한 교재를 이용한다. 정씨는 "부모로서 항상 훈아가 걱정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정씨의 걱정을 덜어준 건 큰 딸이다. 그는 "집을 떠나 동생과 둘이서 지내는데도 너무 잘 지냈다. 사춘기라 예민할 텐데도 옷도 입히고, 목욕도 시키고… 너무 든든했다"고 설명했다. "동생이니까…"라고 입을 뗀 정훈지는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같이 했다. 스키도 같이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같이 다니는 게 자연스럽다"고 쑥스러워했다. 훈아는 "평소엔 언니랑 하루에 너대섯번 씩 싸웠는데 대회를 앞두고는 많이 안 싸웠다"고 미소지었다.

겨우 한 달 연습했을 뿐이지만 찰떡 호흡 덕분에 둘은 눈밭을 능숙하게 달렸다. 크로스컨트리 여자 5㎞ 프리와 2.5㎞ 클래식 모두 대한장애인체육회 꿈나무·신인선수인 봉현채에 이어 참가선수 5명 중 2위에 올랐다. 훈지는 "메달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은메달을 2개나 따 기분좋다"고 웃었다. 훈아는 "한 번 넘어져서 평소 기록만큼은 나오지 않아서 속상하다"면서도 언니를 따라 빙그레 웃었다. 이제 운동을 시작한 자매의 꿈은 무엇일까. "너무 힘든데 정말 재밌어요. 다음에 또 대회에 나오고 싶어요."(정훈아) "동생이 계속 하고 싶다면 저도 같이 하고 싶어요."(정훈지)

평창=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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