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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안 하니” 자꾸 묻거든 …“그럼 1억1900만원 주세요” 되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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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설 밥상머리 내전 줄이려면

일가 친척들이 큰 상에 둘러앉아 따끈한 떡국과 고소한 전을 나눠 먹는 설 풍경. 할머니와 시아버지는 마음 넉넉한 잔칫날인데 노총각 삼촌과 큰며느리에게는 밤고구마처럼 답답한 ‘행사’일 수도 있습니다.

갈등 해결 전문가들의 조언

열에 아홉 집에서 싸움이 난다는 명절입니다. 오랜만에 모인 밥상 앞에서 서로에게 불편한 갈등 요인을 무심코 ‘반찬’으로 올리기 때문일 겁니다. 명절 밥상머리 갈등을 미리 걱정하는 2030의 이야기와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전문가들의 묘수를 들어봤습니다.

“결혼 언제?” 묻거든 … “그러게요” 반복하길

미혼인 강모(30·여)씨는 얼마 전 큰어머니가 수술을 받아 올 설에는 친척들이 큰댁에 모이지 않는다는 소식에 내심 쾌재를 불렀습니다. 몇 년 전부터 친척들의 ‘결혼 압박’에 시달렸던 탓입니다. 강씨는 “오랜 기간 만난 남자친구가 있지만,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다”며 “결혼을 하면 또 얼마 안 가 아이는 안 낳느냐 물을 것”이라고 손사래를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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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언제 하니” “아직도 취직 못했니” 등은 ‘명절 잔소리’의 고전 중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편한 이야기도 거침없이 꺼내기로 유명한 ‘프로불편러’ 곽정은 작가는 이런 친척들의 오지랖 질문이 “평소에 서로의 삶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삼시 세끼 같이 먹게 되니 무슨 말은 해야겠고, 그러다 보니 선을 넘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곽 작가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분위기를 나쁘지 않게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면 “그러게요”라고 대답하길 권했습니다. 이때 불쌍한 눈빛 말고 또렷하고 밝은 눈빛을 연기하는 게 핵심입니다. 불쌍해 보이면 질문한 상대가 ‘옳지. 내가 괜히 걱정한 게 아니구나’ 싶어 한술 더 뜨기 쉬우니까요.

온라인에서는 명절에 제일 듣기 싫은 말에 대한 ‘사이다’ 답변 노하우도 등장했습니다. “연애 안 하니”라는 질문에는 “월 48만7448원(2030 커플의 평균 데이트 비용) 지원해 주시면 당장 연애할 수 있어요” “결혼 안 하냐” 물으면 “1억1900만원(우리나라 평균 결혼비용의 절반) 주세요”라는 식으로 모면하라는 겁니다.

“올해는 아버지와 정치 얘기 할 수 있을까요?”

충청도 사나이 이모(29)씨는 고향집에만 내려가면 과묵해집니다. 아버지와의 대화 주제가 주로 정치 이야기인데 험악한 분위기가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죠. 특히나 이번 설은 정치 얘기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국정 농단 사태에 충청도 출신 대선후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화제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문제는 가치관과 이해관계, 정보의 수준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박일준 갈등관리본부 대표는 “정치적 성향은 매일 함께 지내는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명절에 1박2일 만나는 상황에서는 풀기 힘든 매듭과 고리가 너무 많다”며 “절대 논리만으로는 설득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논리적인 우뇌를 쓰기보다 좌뇌를 활용해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길 권합니다.

평생 한 당만 찍던 아버지가 “이번에 그 당이 이기면 제 사업이 어려울지도 몰라요”라는 아들의 말에 부정(父情)으로 다른 당 후보를 뽑는 일도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님, 나물 좀 무쳐 주세요~”

직장생활을 하는 며느리들에게 코레일이나 한국도로공사가 ‘꿈의 직장’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명절 당일 근무가 당연시되기 때문입니다. 명절에는 유독 며느리의 가사 노동이 강요되는 현실에서 나온 하소연입니다. ‘요즘 며느리’들은 나름의 돌파구를 찾고 있습니다.

외며느리인 송모(35)씨는 지난 추석 때 거실에서 TV를 보던 남편과 시동생, 시아버지 모두에게 일거리를 하나씩 배당했습니다. 남편은 전 부치기, 간을 잘 보는 시아버지는 나물무침, 시동생은 수시로 설거지를 하도록 했습니다. 가족들도 본인이 상차림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고 합니다. ‘며느리의 반란’을 계기로 “다음 명절부터는 최소한의 음식만 하자”는 약속도 얻어냈고요.

최강현 부부행복연구원 원장은 “이번 설은 특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국민이 화가 난 상태라 싸움이 나기 쉽다. 경기도 안 좋으니 부부싸움이 벌어지기 쉬운 여건”이라고 우려합니다. 특히 시댁에 다녀오는 차 안에서 부부싸움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고속도로 대화’를 어떻게 넘기느냐가 갈등 관리의 핵심입니다.

최 원장은 “상대에 대한 비난의 말을 일절 삼가는 게 첫 번째지만 혹여 아내가 시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토로하더라도 남편은 즉흥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그랬구나’로 수긍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또 지금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명절에 고생한 스스로에게 선물이나 보상을 해 주는 것도 마음의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합니다.

“어른들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질문도 없다’고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큰어머니 박모(62)씨는 “듣는 사람은 싫을 수 있겠지만 자식들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온 경험에 비춰볼 때 그 나이에 해야 할 일들을 걱정하는 마음”이랍니다. 아버지는 “평소 관심사가 정치라서 딱히 화제로 삼을 다른 말이 없다”고 합니다. 시아버지는 “찾아준 것만도 고맙다”고 말합니다. 이번 명절엔 이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이현·윤재영 기자 lee.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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