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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언니가 돌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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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정치부 기자

전수진
정치부 기자

예전엔 미처 몰랐다. 미용실에서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성향을 논하게 될 줄은. 오랜만에 찾아간 미용사, 중년 여성 A씨의 관심사는 내 건조한 머릿결도, 신제품 판촉도 아닌 탄핵 재판과 대선이었다. “이정미 (헌재) 재판관이 퇴임하는 3월 13일 이전에는 심판 결과 나오겠지?”부터 “그 ○○○ 후보는 인상은 좋은데 카리스마가 부족해” “나도 미용사지만 (세월호에서) 애들이 죽어가는데 꼭 올림머리를 해야 했을까 몰라”까지, 그의 팩트는 정확했고 의견은 한쪽 스펙트럼에 치우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선 뉴스 앵커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A는 “예전엔 손님들 스트레스 푸시라고 영화만 틀었는데, 이젠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라고 했다. 손님들도 염색하고 커트하며 같이 나라 걱정을 한다고 했다. 국정 공백이 외교 참사와 민생 불안, 물가 상승까지 도미노로 이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는 얘기로 들렸다.

A뿐 아니다. 세상이 ‘아줌마’라고 부르는 여성들은 요즘 정치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정확한 통계치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주요 포털 사이트의 정치뉴스에 댓글을 작성하는 남녀 비율에서 여성이 부쩍 늘었다. 최순실 사태가 빚은 풍경이다. 한 정치 전문 블로거는 “최순실 사태 이전과 비교해 30~50대 여성들의 방문자 수가 30% 이상 급증했다”며 “눈팅만 하는 게 아니라 댓글도 적극적으로 단다”고 귀띔했다. 중년 여성들이 최순실 사태로 인생 제2의 정치사회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해석 가능한 현상이다.

대선후보 캠프들은 이미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한 유력 대선후보 관계자는 지지율 관리 비법을 털어놓겠다며 몇몇 포털 사이트의 엄마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 이름을 읊었다. 운영자들에게 별도로 연락을 취해 캐주얼한 방식의 간담회를 열고, 때론 후보들도 직접 얼굴을 내민다고 했다. 엄마들의 정치적 관심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뜨거우며, 눈초리도 매섭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럴 만도 하다. 조류인플루엔자(AI)에 뻥 뚫린 방역 체계 탓에 계란 한 판 살 때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아이들이 죽어간 세월호의 숨겨진 진실이 폭로되며, 줄어든 관광객 탓에 월급의 지속가능성까지 걱정해야 하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뿔난 언니들이 팔 걷어붙이고 정치를 꼼꼼히 따지고 나설 만도 하다. 촛불집회 현장에 유모차들이 등장하는 건 이제 뉴스도 아니다. 대통령 선거 후보들, 긴장 좀 하셔야겠다. 잘 아시듯 대한민국의 언니들, 한번 화나면 무섭다.

전수진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