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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에서 목격한 중국 IT 산업의 내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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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임미진
임미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임미진 산업부 기자

임미진
산업부 기자

정보기술(IT) 산업에도 계급이 있다. 그 계급이 한눈에 드러나는 곳이 5일(현지시간) 시작해 8일 폐막하는 소비자가전전시회(CES)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마련된 CES의 10여 개 전시관 중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가만 봐도 그 기업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돈만 있다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건 아니다. 기술력과 미래 비전을 증명해야 좋은 부스를 받는다.

글로벌 IT 시장의 최강자는 라스베이거스컨벤션센터(LVCC) 센트럴홀에 주로 모여 있다. 올해도 기술력을 입증한 150개 회사가 여기에 둥지를 텄다. 센트럴홀 안에도 계급이 있다. 앞줄의 계급이 높다. 특히 맨 앞줄 입구의 노른자위는 올해도 삼성전자가 차지했다. LG전자와 소니·캐논·파나소닉·카시오 등은 오래된 앞줄 모범생이다. 눈에 띄는 건 중국 기업 화웨이가 앞쪽에 바짝 따라붙어 소니 바로 뒤에 전시장을 마련했다는 거다. 세계 통신장비 2위, 스마트폰 3위 기업의 위상이다.

신흥 IT 강자들이 자리하는 뒤쪽으로 갈수록 중국 바람이 거셌다. 거의 둘 중 하나꼴로 중국 회사였다. 하이센스·창훙전자·TCL 등 TV 업체들의 위용이 특히 대단했다. TV뿐 아니다. 스마트폰에 꽂으면 주변 공기 질을 측정해주는 스마트센서, 인공지능(AI) 알렉사에 연동한 가정용 조명, 스마트폰에 집게처럼 쉽게 부착하는 망원렌즈 등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중국 기업들에서 쏟아졌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전시를 참관한 한 국내 연구원은 “몇 년 전만 해도 맨 뒤에서 초라한 부스를 차렸던 TV 회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규모를 키우며 부스를 조금씩 전진 배치하고 있다”며 “센트럴홀이 조만간 중국판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중국 기업 참여가 늘다 보니 자리 경쟁은 갈수록 치열하다. 블루투스 오디오를 만드는 중국 광둥성의 한 업체는 “벌써 내년엔 공간이 없으니 다른 홀로 가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인체공학 책상을 만드는 중국 선전의 회사는 “내년엔 두 배의 공간을 확보하고 싶은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중국의 신흥 IT 업체들이 자리를 잡으려 애쓰는 이곳에 아쉽게도 한국 기업은 하나도 없다. 센트럴홀 전체에 한국 기업이라곤 삼성·LG전자 둘뿐이다. 내일 잘나갈 업체가 없는 것이다. 기술력 있는 중견·중소기업을 육성하지 못한 얄팍한 산업 생태계의 결과다. 계급은 쉼없이 바뀐다. 중국은 치고 올라올 뒷줄 우등생이 저리 많은데, 우리는 뒷줄 우등생을 언제 키울 것인가. 기업이란 게 1, 2년 만에 자라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임미진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