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자기 돈이면 그렇게 썼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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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경제부 기자

고란
경제부 기자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국민연금에 대한 옹호론이 고개를 든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한 선택을 놓고 ‘마녀사냥’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2015년 합병 당시 분위기다. 찬성이 대세였다. 관련 보고서를 낸 22개 증권사 가운데 21곳이 찬성 입장에 섰다. 유일하게 한화투자증권만 반대 보고서를 냈다. 운용사도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수박을 들고 대문을 두드리는 삼성물산 직원들의 설득에 소액주주들도 공감했다. 투기 자본에 한국 대표기업을 넘기면 안 된다는 애국심이 작동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삼성물산만 들고 있는 펀드 매니저라면 모를까 국가 경제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찬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무정지 상태의 박근혜 대통령이 노트북도 휴대전화도 반입 금지한 채 열었던 기자간담회에서 강조한 논리도 이거다.

둘째, 국민연금의 반대로 합병이 무산됐으면 그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했겠느냐는 가정이다. 합병 무산으로 삼성물산이 최대주주인 삼성전자의 경영권이 위협받고, 다른 계열사까지 휘청대면 삼성전자·삼성화재·삼성SDI·삼성엔지니어링·호텔신라 등의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이 더 큰 손실을 입을 수 있었다고 우려한다.

셋째,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 성적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해 국내 주식 수익률이 5.6%로 4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목표 수익률(벤치마크) 대비 0.4%포인트 초과 수익을 냈다. 지난해 운용사 평균(0.6%)보다 훨씬 잘했다. 국민연금에 따르면 2015년 연간 운용수익률은 4.6%로, 캐나다·노르웨이 등 글로벌 6대 연기금 가운데 가장 좋다. 투자 성적이 나쁘지 않은데 왜 투자 결정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느냐고 항변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틀린 게 있다. 전제(前提)다. 옹호론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야 어쨌든 괜찮지 않으냐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이 문제 삼는 건 국민연금이 손실을 봤다는 ‘결과’가 아니다. 핵심은 과정이다. 기금운용본부의 판단에 외부의 입김이 들어갔느냐, 대통령의 이해 관계를 위해 국민의 돈이 동원됐느냐의 여부다.

“자기 돈이면 그렇게 했을까.”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는 가장 유효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있게 내놓지 못하니 ‘무용론’까지 나온다. 국민연금에 지금 필요한 건 “어쨌든 잘했다”는 자화자찬이 아니라, 국민의 돈을 제대로 굴리고 있다는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고란 경제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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