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인 꿈꾸며 문학에도 심취|자작시 읆조리던 모범생 이한열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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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그대 가는가, 어딜 가는가/그대 등 뒤에 내리 깔린 쇠사슬을 손에 들고/어딜 가는가/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4천만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그대 왜가는가』 자작시 「그대 가는가」의 구절처럼 연대생 이한열군(20·경영2)은 이시대 젊은이의 아픔을 안고 끝내 가 버렸다.
「전문 경영인」「큰회사 사장」을 꿈꾸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작시를 읊는 문학청년이었던 이군은 박종철군과 함께 이시대의 마지막 희생자로 「꽃상여타고」갔다.
광주출신. 신장 1백75cm, 체중 68kg, 혈액형 B형.
이군은 아버지 이병섭씨(55·화순농협직원)와 어머니 배은심씨(49)의 2남3녀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82년 광주진흥고에 입학, 1·2학년때는 학생장을, 3학년때는 총학생장을 맡은 이군은 고교시절 통솔력있는 모범생으로 교내 문학서클인 「여명」에서 활동하는등 문학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학교성적도 뛰어나 중·고교 줄곧 우등을 차지했고 고교졸입때는 문과 2백40명중 10등 이내를 유지했으나 85년 입시에서 서울대 경영학과를 낙방, 재수끝에 이듬해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평소 너무 착하고, 너무 성실했는데‥ 이 서울개봉동 영실아파트에서 방 2칸을 세내 이군을 뒷바라지해왔던 세째누나 세숙씨(24·인천여상교사)는 복받치는 설움을 가누지 못했다.
이군의 공부방 책상앞에는 다음과 같은 생활신조가 적혀있어 그의 성품을 잘 말해준다.
일, 광주 부모님께 1주일에 한번 전화하고 한달에 한번 편지를 쓴다.
일, 담배는 하루에 한갑만 피운다.
일, 술은 연일 마시는 것을 피한다.
일, 외박은 단체활동을 제외하곤 일체 피한다.
대학에 진학한 이군은 학과공부보다 사회과학서적에 심취해 성적은 별로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논리정연한 달변가로 교내집회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고 친구들과 토론을 즐겼다.
2학년이 되면서 이군은「만화사람」이란 교내서클에 가입, 「혁」이란 필명으로 기획부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지난 4·19주간에는 교내에서 「시사만화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광주사태때(당시 중2)는 죽을까봐 겁이나 거의 이불속에서 지냈다』고 말하곤 했다는 이군은 특히「광주의 아픔」에 대해 평소 몸시 괴로워했다.
같은 서클 이태직군은 『친구의 슬픔엔 팔을 걷고나서 위로해주곤 했으나 술을 마시면 광주이야기를 하며 우울해했다』고 이군을 회고한다.
『5월의 광주가 백양로에서 울렸다…어린날 나는 자연을 만끽했고 고풍의 문화재에 심취했다.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채 살아왔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하여 오늘은 다시 살아나는 날, 내가 우리가 되는 날이어야 한다.』(5월18일자 이군의 일기)자작시에서도 그의 번민은 엿보인다.
『이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이 순수인지 잘 모릅니다. 나쁜것들을 깨뜨리려는 항거가 진정 많은 우리를 위한 순수핵일는지, 어쩌면 코피 한잔에서 사랑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진정 우리를 위한 순수함일는지. 진실로 두렵습니다.
알고싶습니다.
내 마음의 사립문을 열어야겠습니다.』
지난 27일동안 그의 병상을 지켰던 친구들의 애잔한 합창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 「친구」를 받는 이군의 자작시 메모는 자신의 참변을 예견했던듯 하다.
『…최루탄가스로 얼룩진듯한 저 하늘 위에라도 오르고 싶다』 <박의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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