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친박 핵심들, 이정현 따라 탈당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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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새해 첫날 박근혜 대통령이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나는 완전히 엮였다”고 강변해 국민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이날 새누리당의 서청원·최경환·조원진·윤상현·홍문종 의원 등 친박 핵심들도 모여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는 식으로 진영 방어에 골몰했다고 한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박 대통령과 그를 옹호해 온 친박 인사들은 나라를 이렇게 망가뜨려 놓고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걸까. 지난해 4월 총선 참패, 10월 촛불집회 이후 새누리당이 쪼개지고 대선후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10%대 지지율을 헤매게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라가 망가지고 집권당이 쪼개졌는데도 새누리당 중추세력 가운데 누구 하나 “내 탓이요”를 외치며 물러나는 사람이 없으니 진짜 위기는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염치와 양심, 책임감이라곤 찾기 어려운 형편없는 정치세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염치·양심·책임 없는 저열한 정치세력
정치는 유무죄보다 결과에 책임져야
서청원·최경환, 당 재건 위해 떠나길

 이런 가운데 어제 이정현 전 대표가 “직전 당 대표로서 후임 당 대표에게 백척간두 상태로 당을 물려주는 것도 죄스러운데 제가 걸림돌이 된다면 도리가 아니다”며 “모든 책임을 안고 탈당한다”고 밝힌 건 희미하나마 희망의 빛일 수 있다. 새누리당에 인적 청산 바람은 인명진 비대위원장이 불러일으켰다. 그는 삼고초려 끝에 당 비대위원장 후보로 영입돼 전국위원회의 승인을 받자마자 “박근혜 정권에서 당 대표와 정부 고위직을 지낸 사람, 총선 때 당의 분열을 조장한 사람, 무분별한 언사로 국민 눈살을 찌푸리게 한 사람들은 1월 6일까지 탈당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범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박 대통령을 비롯한 친박 핵심들인데 이정현 전 대표가 제일 먼저 응답한 셈이다.

 인 비대위원장은 친박 핵심들을 인적으로 청산한 뒤 부패·기득권·패권주의를 일소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해 새로운 보수정당을 재건한다는 계획이다. 당을 살리기 위해 당을 떠나는 이정현 전 대표의 행동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 다음 차례로는 봉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배신-의리론’을 앞세워 친박 패권세력의 울타리 역을 자임한 서청원 의원과, 경제부총리를 지냈고 4월 총선 때 친박 패권공천을 쥐락펴락했던 최경환 의원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친박 집단의 리더들이 당에 박혀 있는 한 새누리당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건 당의 다른 의원들이나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 사이에 널리 퍼진 공감대다. 홍문종 의원에 따르면 그나마 서 의원은 “정리가 되면 당을 떠난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하는데 최 의원은 “2선 후퇴만 하면 됐지 왜 내가 나가야 하느냐. 차라리 날 죽여라”고 저항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는 법의 세계와 다르다. 유죄가 아니라고 면죄부를 받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죄라도 민심의 심판에 책임을 지는 게 정치의 세계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완벽하게 몰락한 이상, 한때 친박과 집권세력의 정점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을 떠날 이유는 충분하다. 물러날 때 물러나야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