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제 개헌" 엄청난 댓가 치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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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대통령직선제를 받아 들이겠다는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의「폭탄선언」이 29일 있기 까지 여와 야는 물론이고 전국민이 벼랑 끝에선 극한적 불안감 속에 참으로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와야 했다. 엄청난 댓가도 지불해야 했다.
밤낮 없이 거리에 자욱한 최루탄 연기, 돌과 화염병이 난무한 가운데 수천명 단위의 연행,수백명 단위의 구속사태가 일상화했고 급기야는 꽃다운 학생·전경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2·12」「4·30」「4·13」「5·3」「6·10」「6·26」등 수많은 숫자나열로 대변되는 가파른 개헌정국은 정당과 정파, 국민간의 대립과 반목, 증오심을 심화시키면서 국논분열을 뛰어넘어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까지 치달았으나 어느 한번도 위기 극복의 희망을 안겨준 적은 없었던게 사실이다.
개헌문제, 특히 대통령직선제등 권력구조를 둘러싼 여야간의 공방전은 85년 2·12 총선에서 부터 가장 큰 쟁점으로 표면화됐다고 볼 수있다.
『대통령은 내손으로 뽑자』는 선거구호를 내 걸었던 당시의 신민당이 12대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제1야당으로 부상했고, 이후 여야는「직선제개헌」이냐, 「호헌」이냐를 놓고 1년 가까이 극한 대립을 지속했다.

<개헌·호헌대립>
이같은 대립양상은 1년후쯤인 지난해 16일 전두환대통령이 새해 국정연설에서「개헌논의는 89년 이후에 가능하다」며 개헌에 대한 첫 긍정적 입장을 보임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개헌」자체를 입에 담기만 해도 범법시 하던 상황에서 개헌논의가 가능한 상황이 되자 당시 신민당은 다음달인 2월6일 김영삼씨의 입당을 계기로 총선1주년인 86년2월12일 개헌서명운동을 전격적으로 감행했다.
정부·여당도 이에 밀릴세라 신민당사·민추협 사무실봉쇄와 서명부압수등으로 강경대치했으며 그런 과정에서도 당시 신민당은 1천만서명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당시 서소문로 민추협사무실 앞길에서 김영삼씨가 경찰에 의해 강제로 차에 실려나가고 취재 기자들이 집단 폭행당하는 와중에서 뒤틀린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열린 것이「2·24 청와대 3당 대표회담」이었다.

<헌특은 이름뿐>
이 자리에서 전대통령은 국회안의 헌법특위 설치에 호의적인 반응을 표시함과 아울러 정부내에 개헌을 위한 특위구성 의사까지도 밝혔다. 전대통령은 그와 함께「88년까지 헌법을 연구해 89년 개헌가능」의 입장을 보다 강하게 표명했다.
그러나 야권의 대응은 당장 정면거부로 나타났다. 3월7일 당시 이민우신민당총재와 김영삼·김대중씨등 3자는 기자회견을 통해 전대통령의「2·24제의」를 정면 거부하고 『86년까지 직선제 개헌을 끝내야 할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른바 장외 투쟁에 돌입했다.
3월11일 서울을 시발로 시작된 개헌추진 시도지부현판식이 장외투쟁을 현실로 보여줬다.
그러다가 이해 4월30일 전대통령은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3당 대표를 청와대로 초치, 마침내 임기중 개헌 용의를 분명히 밝혔다.
전대통령은 이날『개인적으로는 88년까지 현행 헌법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는 전제를 달긴 했으나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건의하면 재임 기간중에 개헌하는데 반대하지 않겠다』고 표명함으로써 개헌논의는 보다 희망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5월3일 인천사태의 불길한 행사도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4·30청와대 회동」에 따라 5월 29일 노민정당대표와 이신민당총재는 회담을 갖고 6월 열리는 국회에서 헌특을 구성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에따라 국회는 6월24일 본회의에서「국회헌법개정 특별위원회」구성을 결의하기에 이르렀고 7월30일 민정23, 신민17, 국민4, 무소속1 명등 모두 45명의 의원으로 헌특을 공식발족 시켰다.

<이민우 구상파동>
대다수 국민들은 이 헌특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원만한 개헌작업이 이뤄지기를 갈망했으나 민정당에서 내각제 개헌안을, 신민당과 국민당에선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제출, 팽팽히 맞서기만 했다. 더욱이 어처구니 없게도「공청회 TV 생중계」라는, 지금 생각하면 가소로운 문제를 놓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바람에 그 출발점에서 부터 좌초하고 말았다.
국회헌특이 이름만 있을 뿐 활동 중지상태에 머물러 있던 터에 이신민당총재와 두김씨는 9월29일 회동, 『난국 타개의 유일한 길은 실세대화』라면서 『이 실세대화가 이뤄질때까지 헌특에 불참한다』고 선언해 버렸다.「두 열차의 정면충돌」「벼랑끝」「막다른 골목」이란 어휘가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하면서 이신민당총재는 10월10일 그 타개책으로「선택적 국민투표」를 들고 나왔다. 『이렇게 팽팽히 맞서기만한 상태에서 시간만 가니 국민에게 직접 묻자』는 아이디어였으나 민정당은 위헌임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고문치사 폭풍>
10월17일 유성환의원이 국시발언 문제로 구속되고「개스턴·시거」미국무성 동아·태차관보가 방한하는 가파른 정국 전개속에「11·29 개헌추진 서울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좌절되고 이신민당총재는 12월24일 이른바「이민우구상」을 발표, 신민당 분당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대통령은 지난1월12일 새해 국정연설에서「합의개헌의 조속매듭을 거듭촉구」하면서 합의가 안될 경우 중대결단을 예고했다.
이틀후인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고 부산 형제 복지원사건등이 뒤를 이으면서 난기류에 빠져든 개헌논의는「고문정국」으로 바뀌어「2·7추도회」 「3·3대행진」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지더니 4월8일 신민당은 두김씨가 신당창당을 선언함으로써 마침내 분당의 길을 걷고 말았다.
그러자 전대통령은 국회헌특에서도 합의가 되지 않고 신민당이 분당하는 정국등을 이유로 들어 마침내「4·13개헌유보」의 중대결심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중대발표는 야권은 물론 개헌의 기대에 찼던 대다수 국민들을 실망시켰고 이는 6·10대회 와 6·26대회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노대표 중대결단>
계엄령등 비상조치 가능성등이 점쳐지는 위기감속에서 2주일 이상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여권에서 획기적인 무엇이 나와야 한다는 소리가 높은 가운데 6·24 청와대 영수회담이 열려 전대통령·김영삼 총재의 첫 대면이 이뤄졌으나 문제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6월29일 상오 노대표의 「대통령후보와 대표위원사퇴의 배수진을 친 특별선언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실로 파란만장하고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나온, 여도 야도 놀란 일대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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