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흘리는 국민과 정치표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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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금 한국파워가 선진국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 자동차 전쟁은 한·미·일 3파전이다. 20년후면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 한다-모두 외국인들이 한 얘기다. 역사의 오랜 시기를 강대국에 눌러 가난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온 우리에겐 신명나는 말들이다.
60년대의 종속이론은 자본주의 세계를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었다. 거기서는 두지역이 지배-종속관계에 있다고 본다. 주변부 국가들의 빈곤과 정체는 전적으로 중심부에 의한 착취의 결과다.
주변부가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돼 있는한 발전은 없다. 「저발전의 발전」만 지속될 뿐이다. 이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은 중심부와의 관계를 끊고 국제자본주의체제에서 탈출하는 것뿐이다.
이런 종속이론의 2분법을 수정하고 나온 것이 7O년대의 세계체계이론(world-system theory)이다. 여기서는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에 준주변을 설정하고 거기에 신흥공업국가들(NICS)을 대입시킨다.
「월러스타인」은 이 나라들을 준제국주의(sub-imperialism)로 규정했다. 준제국은 중심부의 선진제국주의에 도전하면서 주변부 후진국들에 대해 지배권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장 대표적인 준제국으로는 한국이 꼽힌다.
이것은 외교용어나 매스컴의 호칭이 아니다. 학자들이 학문적 검토를 거쳐 내린 결론에서 나온 말이다. 세계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아주 활기차고 장래가 밝은 「작은 호랑이」다. 한국경제를 「인공적인 기적」이라고 표현한 「워로노프」는 우리 국민의 활력을 가리켜 「조용한 아침나라의 핵폭발」이라고 했다.
지난 4월23일 일본의 아침 TV는 한국자동차와 전자제품·카메라등의 미·일 시장진출을 20분이상 방영했다. 이 프로는 한국상품이 「비싼 것이 좋은 물건」이라는 일본의 통념을 깨고 「싸고도 좋은 물건」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금 대만의 외화보유는 6백억달러에 육박한다. 그것은 한국 GNP의 절반이 넘는다. 우리 외채를 갚고도 1백억달러이상이 남을 액수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오히려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중소기업을 토대로한 대만 경제는 돈은 벌었지만 그것을 재투자하여 대규모 계획을 벌일 경영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엔 자금만 있으면 천지개벽이라도 해낼 유능한 경영자집단이 있지않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국제정치경제학의 주요 관심사는 한국같은 준주변이 중심부가 될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세계체계론은 결론을 보류하고 있다. 종속이론은 한마디로 「노」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의 착취때문에 중간계급은 영구히 부르좌가 될수 없고 오직 프롤레타리아로 전락될 뿐이라는 마르크스이론의 국제판이다.
그러나 대만 태생의 문명사가 사세휘는 종속이론의 부가론을 거부한다.
25년전 미·일의 1인당 GNP는 5대1, 1인당 수출고는 2·5대1이었다. 지금 일·한의 그것은 각각 5대1과 2대1이다. 그는 이런 사실을 들어 2005년 내지 2010년에 한일역전이 이뤄질 것으로 보았다. 그 두 해가 각각 을사보호조약과 합방조약체결 1백주년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감개는 더욱 크다.
사세휘는 한국의 가능성을 독창성·강인성·교육열에 바탕을 둔 우리의 잠재력과 역동성에서 찾았다. 주53시간 이상의 노동으로 일본인을 게으름뱅이로 만든 근면성과 하버드대학의수석, 기능올림픽의 메달을 석권하는 우수성도 강조했다.
정보화시대에 영어를 아는 일본인들은 일본어를 모르는 미국인과 싸워이겼다. 마찬가지로 일본어에 능숙한 한국인이 한국어에 미숙한 일본인과 싸워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5천년의 빈곤과 일제착취, 6·25의 참화를 딛고 오늘의 경제를 이룩했다. 사회·교육·문화·종교의 성장도 성취했다.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헝그리정신」으로 무장하여 싸워온 성과다.
이제 남은 것은 선진권 진입이다. 일본이 미국을 앞질렀고 한국이 일본을 추월한다는 것은 준주변이 중심부로 될수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것을 실증하는 주역이 돼야한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생산적인 정치지도력이다. 정치권력은 강대하나 능률적인 정치력은 없다. 정치인은 많아도 헌신적인 지도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의 기대를 부풀게 했던 민주화는 원점으로 갔다. 그 반작용으로 연일 격렬한 시위와 단식·시국성명이 잇따른다. 정치는 해결능력을 잃은채 표류하고 있다.
대형부정수사는 의혹을 남긴채 덮어졌다. 범양의 1백억원 비자금 내막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밤노동을 하여 오늘의 번영을 가져온 산업근로자들의 임금수준을 생각해보자. 범양에서 흘러나간 검은돈의 행방은 반드시 밝혀져야한다.
일본의 미국추월은 군국주의의 청산과 완벽에 가까운 민주제도위에서 가능했다. 독주나 독식은 없었다. 온국민이 함께 뛰어온 결과다. 선진 자본주의가 60년대의 내적갈등을 극복하고 오늘의 안정을 되찾은 것은 정부가 계속 국민의 자유를 신장하고 분배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들은 선진을 목표로 세계와 싸우며 힘겹게 뛰고 있다. 이전사들의 사기를 꺾지 말라. 역사적 도약단계에서 국민적 추진력을 김빼는 처사가 용납돼서도 안된다.
애국적인 지도력과 효율적인 정치력-이것 없이는 우리의 장래가 결코 밝을수 없다. 2010년의 민족사적 대드라머도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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