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8 - 예수가 몸소 보여준 싸움의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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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었다. 예수와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나눈 집에서 빠져나왔다. 예루살렘 성에서 벗어나 동쪽의 올리브 산으로 갔다. 거리는 멀지 않았다. 도보로 불과 20분 거리다. 공기는 차갑고 어두웠을 터이다. 유다는 ‘예수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 만찬 도중에 나가버렸다. 올리브 산의 어귀쯤이었을까. 예수 일행은 산의 아래쪽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도성쪽에서 바라본 올리브 산. 중턱에 흰 돌로 덮인 부분이 유대인 공동묘지다.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복음 26장31절) 구약 성경에 있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는 대목을 인용하며 예수는 ‘제자들의 돌아섬’을 내다봤다. 베드로는 발끈했다. 그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오직 예수’를 피력했다. 세상 모두가 변해도 나만은 변하지 않으리라. 그게 베드로의 심정이었다. 예수 앞에서의 맹세였다.

예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복음 26장34절)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펄펄 뛰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주위의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 성 베드로 교회의 출입문에 새겨진 조각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고 하자 베드로가 손을 내젓고 있다.

예루살렘 성 베드로 교회의 출입문에 새겨진 조각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고 하자 베드로가 손을 내젓고 있다.

나는 예루살렘 성을 나와 올리브 산으로 갔다. 예수와 제자들이 밤을 틈 타 밟았을 땅. 그 땅을 나도 밟았다. 당시 예수 일행은 쫓기고 있었을 터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수는 알고 있었으리라. 올리브 산을 올라가다가 나는 멈추어 서서 골목의 담벼락에 기댔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 예수가 ‘베드로의 부인과 세 번의 닭울음’을 예언한 곳은 겟세마네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그러니 이 담벼락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을 것이다. 나는 서서 예수의 어록을 묵상했다. “오늘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예수는 나무다. 올리브 산의 곳곳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다. 그럼 제자들은 뭘까. 또 우리는 뭘까. 잎이다. 그 나무에 붙어 있는 올리브 잎이다. 그런데 나무가 말했다.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청천벽력이다. 나무가 없으면 잎은 죽고 만다. 잎은 나무에서 떨어져 살 수가 없다. 그런데도 예수는 말했다. 닭 울기 전에 너희는 세 번이나 나무를 부인할 것이라고. 그것도 자진해서 말이다.

이스라엘은 햇볕이 강렬한 사막 기후다. 올리브 나무는 그런 볕을 견디며 자란다. 나무가 없다면 잎은 순식간에 말라버린다.

이스라엘은 햇볕이 강렬한 사막 기후다. 올리브 나무는 그런 볕을 견디며 자란다. 나무가 없다면 잎은 순식간에 말라버린다.

예수와 제자 일행은 산을 더 올라갔다. 이윽고 겟세마네에 도착했다. 올리브 기름을 짜는 방앗간이다. 주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 내려오는 유대인의 묘지가 곳곳에 있다. 겟세마네에 도착한 예수는 갈림길에 있었다. 삶이냐, 아니면 죽음이냐. 그런 갈림길에서 예수는 고뇌했다. 도망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겟세마네에서 걸음을 멈출 이유도 없었다. 곧장 올리브 산을 넘어가 광야가 있는 사해 쪽을 향해 멀리 길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예수는 여기서 멈추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다음에 예수는 무엇을 했을까. 그 갈림길에서 예수는 어떤 일을 했을까. 예수가 택한 답은 무척 뜻밖이다. 그는 ‘기도’를 택했다. ‘하늘의 뜻’을 묻는 일을 택했다. 밤이 꽤 깊지 않았을까. 예수가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은 모두 잠에 취해 곯아 떨어졌다. 예수가 몇 차례나 “깨어있어라”고 당부했지만, 그들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의 갈림길’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 ‘삶이냐, 죽음이냐’라는 예수의 고뇌를 모르고 있었다.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1455년 작 ‘겟세마네의 기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예수와 잠에 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1455년 작 ‘겟세마네의 기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예수와 잠에 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예수는 몸부림쳤다. 실제 마태복음에는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태복음 26장38절)고 기록돼 있다. 그게 예수의 적나라한 심정이었다. 누가복음에는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누가복음 22장44절)고 적혀 있다. 왜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을까. 간절했기 때문이다. 혼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절박한 예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마태복음 26장39절)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고, 예수는 ‘돌을 던지면 닿을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누가복음 22장41절) 기도를 했다. 그게 대략 15미터쯤 됐을까. 기도를 하다 돌아와 보면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깨어있어라”고 당부를 한 뒤 다시 기도를 하다 돌아와 봐도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는 그렇게 세 번이나 기도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하늘의 뜻’을 세 번이나 물었다. 하늘의 답은 분명했다. 제자들에게 돌아온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하늘의 답은 ‘예수의 죽음’이었다.

겟세마네에는 아름드리 올리브 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다. 예수 당시에 있었던 올리브 나무의 종자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겟세마네에는 아름드리 올리브 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다. 예수 당시에 있었던 올리브 나무의 종자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겟세마네 동산을 걸었다. 굵직굵직한 올리브 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우리는 갈망한다. ‘하늘의 뜻’이 언제나 ‘나의 뜻’을 따라주길 바란다. 그렇게 따라줄 때 우리는 또 말한다. “나의 기도가 통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예수의 기도는 다르다. 우리의 기도는 나를 키우고, 예수의 기도는 하늘을 키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지 마시고,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 그게 우리의 기도다.

만약 ‘아버지의 뜻’이 나의 뜻과 다를 때는 어떨까. 우리는 그걸 ‘아버지의 뜻’이라고 받아들일까.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지 않는다.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대신 ‘나의 뜻’만 따진다. 내 뜻을 따라 하늘이 움직이는지만 따진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는 몸소 보여주었다. 기도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는 건지 말이다. 예수에게 기도는 ‘하늘의 뜻’을 묻는 일이다. 그게 나의 뜻과 다를 때는 어김 없이 ‘광야’가 펼쳐진다. 예수가 40일간 단식하며 만났던 싸움의 광야다. 그게 나의 내면에 펼쳐진다. 나의 뜻을 따를 건가, 하늘의 뜻을 따를 건가. 그걸 결정하는 싸움이다. 예수는 광야에서도, 겟세마네에서도 우리에게 ‘싸움의 방향과 싸움의 기술’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싸울 때 하늘의 뜻이 드러나는지 말이다. 그게 예수가 몸소 보여준 기도의 진정한 의미였다.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아름드리 올리브 나무.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아름드리 올리브 나무.

겟세마네에는 거대한 올리브 나무도 있었다. 어른들 여럿이 손에 손을 잡고 둘러서야만 껴안을 수 있을 만큼 컸다. 그 근처에 돌판이 하나 있었다. 새겨진 글귀는 이랬다. ‘MY FATHER, IF IT BE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THOU WILT.(Matthew 26:39)’ 올리브 나무들 곁에는 장미가 피어 있었다. 풀들도 자라고 있었다. 그 사이를 거닐며 나는 묵상에 잠겼다. 2000년 전, 이곳에 엎드려 기도했던 예수. 그가 서 있던 삶과 죽음의 갈림길. 어쩌면 예수에게는 그 길이 갈림길이 아닐 수도 있었을까. 예수의 눈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는 외길일 수도 있었을까. 그럼에도 겟세마네에서 털어놓은 예수의 “너무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심정과 피처럼 흘린 땀방울은 우리의 어깨를 토닥인다. 예수 역시 우리처럼 번민하고, 그 번민을 뚫고 갔다는 사실이 소나기 같은 위로와 용기로 우리를 적신다.

올리브 동산의 돌판에 새겨진 예수의 기도문.

올리브 동산의 돌판에 새겨진 예수의 기도문.

바로 그때였다. 예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성전의 사제들과 경비병들이었다. 그들이 어둠을 뚫고 예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몰려왔다. 손에는 횃불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어떻게 예수를 찾았을까. 어두운 밤, 예수와 제자들만 은밀히 움직였을 터인데 말이다. 성전 경비병들 앞에 유다가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처럼 말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다가와 “스승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며 입을 맞추었다. TV도 없고, 신문도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캄캄한 밤이었다. 성전에서 온 이들은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몰랐을 터이다. 한밤중이라 얼굴 식별은 더욱 어려웠다.
유다가 그 문제를 해결했다. 예수에게 건넨 ‘배신의 입맞춤’으로 말이다. 그들 사이에는 ‘유다가 입맞추는 사람이 예수’라는 신호가 미리 약속돼 있었다. 입맞춤과 함께 성전의 경비병들이 예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욱하는 성격의 베드로가 칼을 뽑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용도로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니기도 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는 대사제의 종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상대방의 귀가 잘렸고, 피가 흘렀다.

이탈리아 화가 지우제페 세자리 작 ‘체포 당하는 예수’.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세자리 작 ‘체포 당하는 예수’.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예수가 입을 뗐다.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복음 26장52절)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복음 18장11절)

죽음의 그림자 앞이라고 예수의 가르침은 달라지지 않았다. 예수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고 했다. 칼이 뭔가. 분노다. 예수는 “네가 꺼낸 분노를 다시 근원으로 되돌려라”고 말한 셈이다. 우리는 수시로 가슴에서 칼을 꺼낸다. 분노의 칼, 증오의 칼, 두려움의 칼, 원한의 칼을 자꾸만 칼집에서 꺼낸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말한다. “도로 칼집에 꽂아라!” 무슨 뜻일까. 포맷을 시키란 말이다. 0으로 되돌리고, 공(空)으로 되돌리고, 고요로 되돌리라는 뜻이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1440년 작 ‘예수의 체포’.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1440년 작 ‘예수의 체포’.

예수의 눈에는 빤히 보인다. 칼을 꺼낸 자는 칼로 망하고, 분노를 꺼낸 자는 분노로 망하고, 원한을 꺼낸 자는 원한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그 칼이 상대를 찌르기 전에, 자신을 먼저 찌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했다. 왜 그럴까. 칼이 들어간 자리, 분노가 들어간 자리, 원한이 들어간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일이야말로 나의 십자가다. 증오를 다시 칼집에 꽂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십자가다.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되는 급박한 순간에도 예수의 눈, 예수의 말씀은 이치를 관통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달리 말한다. “이 잔은 내 잔이 아니오. 저 잔을 주시오. 저게 내가 원하는 잔이오.” 예수는 달랐다.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칼부림 속에서도 예수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기꺼이 잔을 받았다. 그 잔의 이름은 ‘십자가’였다.

예수가 체포되는 광경을 묘사한 렘브란트의 스케치 작품.

예수가 체포되는 광경을 묘사한 렘브란트의 스케치 작품.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예수가 엎드려 기도했던 바위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그 위로 고요가 흘렀다. 저들은 무엇을 찾고 있을까. 저들은 무엇을 구하고자 기도를 할까. 나의 뜻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일까.

<39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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