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의 역설, 한국 외교 자율성 높일 기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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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8 면

윤영관 교수는 중국엔 ‘북 위협이 존재하는 한 한·미 동맹은 확고하다’는 점을, 미국엔 ‘대(對)중국 포위 다자 틀에 한국은 빠지는 게 맞다’는 걸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김경빈 기자

분노와 불안의 시대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의 예기치 못한 당선,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정 마비, 북한 김정은의 핵 위협 이 세 가지를 두고 대한민국이 ‘3재(災)’의 수렁에 빠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윤영관(65·전 외교통상부 장관) 서울대 명예교수는 “역설적으로 트럼프 시대 한국 외교의 자율적인 공간이 훨씬 넓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 국정의 쇄신과 수습을 대전제로 했을 때다. 지난 13~21일 미국 아시아재단(Asia Foundation)이 주최하는 ‘미국의 대아시아 역할에 대한 아시아적 시각’ 주제 미국 순회 토론에 참가하고 돌아온 윤 명예교수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 분위기는 어떤가.


“아시아재단 토론회는 미 대선이 있는 해마다 하는 프로젝트인데, 아시아의 시각으로 정책을 제안하고 이를 워싱턴에 전달하는 일종의 소통 기획이다. 지난 4월, 7월 워크숍을 거쳐 대선 직후 동남아의 태국, 서아시아의 인도 그리고 미국 학자들과 더불어 동북아 지역을 대표해서 워싱턴DC와 뉴욕, 샌프란시스코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났다. 세 도시 모두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한 곳인데, 다들 트럼프 승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심리적으로 적응 노력 중’ ‘어쩌다 이렇게 됐나’ ‘납득이 안 된다’고들 했다. 트럼프가 4년을 채우지 못할 거라고 믿는 사람도 꽤 있었다.”


-우리도 대비 없이 트럼프 시대를 맞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가치보다는 이익과 거래 우선의 외교 기조를 펼칠 거란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한·미 동맹이라는 일종의 가치 동맹을 공유해 온 우리 입장에선 어려운 점이 많을 거다. ‘한국이 안보 무임승차를 해왔으니 이제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 아닌가. 그런데 이런 상황이 오히려 한국 외교의 자율적인 공간을 넓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주인의식,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외교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의 국익 입장에 충실하게 단기·중장기 외교 전략을 마련하고 트럼프 행정부에 우리 입장을 인풋(설특)할 수 있는 여지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트럼프가 한동안 북한 핵 등 한반도 문제는 신경 쓰지 않을 거란 관측도 있는데.


“국내 경제 회복을 최우선 의제로 강조하고 북한 문제는 중국에 넘기는 뉘앙스로 말했던 점이 우려된다. 여기서 우리 역할이 중요하다. 아시아재단 보고서에도 언급했는데, 향후 2~3년 내 북핵은 미국엔 과거와 차원을 달리하는 안보 위협이 될 것이다. 비핵화 정책의 선택지가 별로 없다. 대북제재를 효과적으로 강화해 김정은이 핵 보유 옵션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판단, 대화에 나서도록 압박하는 수밖에. 이와 함께 미국과 중국을 향해 북한 문제를 미·중 간의 국제 경쟁 구도에서 분리해 다뤄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 마이클 플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의 경우 미국 안보의 최대 적을 극단주의 이슬람으로 보는 매파로 알려져 있다. 국무 및 국방장관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생기는 상호 역학관계도 한반도 정책의 중요 변수가 될 것이다.”


-효과적인 제재란 이란 핵 문제를 해결로 이끈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등 제3국가, 기업도 제재)을 뜻하나.


“그렇다. 사실 오바마 행정부는 의회로부터 세컨더리 보이콧 집행 위임을 받았지만 (다른 사안에서 협조가 필요한) 중국과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인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핵 해결에 에너지를 100% 쏟지는 않았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문제는 북핵 고도화가 완성될 걸로 보이는 트럼프 행정부 4년인데 미리 중국과 협력해 대비하지 않으면 위험한 옵션(Surgical Strike·정밀폭격)을 검토했던 1994년 5~6월과 비슷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북한은 어떤 선택을 할 건가. 도발 시 트럼프는 어떻게 대응할 건가.


“북한은 대개 미국의 새 행정부가 들어서면 군사 도발을 했다. 이번엔 과거와 완전히 다른 성격의 행정부여서 북한의 고민이 클 것으로 보인다. 예측이 쉽지 않을 거다. 도발했을 때의 리스크와 이익을 놓고 계산할 거라고 본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논란에서 보듯, 미·중 갈등 구도에서 외교가 쉽지 않다.


“세계 전략 차원에서의 미·중 경쟁으로 중국은 어떻게든 한·미 동맹을 떼어놓으려 하고, 미국은 대중 포위 전선의 구성원으로 한국을 두려 한다. 중국에 대해선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따라서 한·미 동맹은 확고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미국에도 과거 해양세력의 중국 진출 통로로 한반도가 이용된 역사를 들어 혹시라도 대중 포위 연합전선에 한국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되고, 그것이 미국이 동북아에서 안정적인 영향력을 유지하는 길이란 점을 설득해야 한다.”


-트럼프 당선이 국제 질서에서 갖는 의미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이다. 80년대 이후 심화·확산돼 온 세계화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1차, 8년 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로 2차 제동이 걸렸다. 미 대선에서 클린턴이 당선되면 반(反)세계화, 반(反)자유주의 바람이 진정되고 기존 흐름이 유지되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 그 반대가 될 것으로 봤다. 2000년대 들어 시장 만능주의 경향이 과도해지고 도덕적 해이까지 겹쳐 금융위기가 터졌다. 위기 해소 과정에서 농촌과 쇠락한 제조업 지대 주민, 백인 저학력 노동자 등 그간 세계화 흐름에서 소외된 이들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기존 정치 시스템에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2000년대 후반 자리 잡은 미국과 중국, 즉 G2 대결 시대에도 변화가 오나.


“국제 질서의 다극화가 가속화하고 국제 리더십의 공백 상태가 올 수 있다고 본다. 미국 내부의 문제가 트럼프 시대를 탄생시켰지만 그 파장은 국제적이다. 트럼프는 ‘해외 문제에 개입할 여유가 없다’고 했다. 트럼프 시대가 4년이 될지, 8년이 될지 모르지만 그가 있는 동안 미국 외교는 ‘고립주의’와 ‘미국 우선주의’를 기조로 거래를 바탕으로 한 실리 추구를 지향할 것이다. 민주주의나 인권 증진 등 가치를 앞세워 온 기존의 외교 기조는 뒤로 빠지고, 이는 곧 미국의 대외 영향력 쇠퇴로 연결되지 않겠나. 그 힘의 공백을 중국·러시아 등이 파고들면서 국제 질서는 더 심화된 다극화 체제로 변모할 걸로 예측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의 양극 질서, 91년 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1극 질서에서 2008년 금융위기를 틈탄 중국 부상 이후 미·중을 중심으로 한 다극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트럼프 당선으로 다극화 경향은 더 강화될 것이란 얘기다. 아시아에서도 미국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빠지면서 중국을 의식한 일본과 인도도 그 공백을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2011년 5월 1일 미 백악관 상황실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조 바이든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마이클 멀린 합참의장, 윌리엄 데일리 백악관 비서실장과 함께 미 해군 특수부대의 오사마 빈라덴 급습 작전 실황을 지켜보고 있다. 윤영관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이 참모들과 토론 없이 외교안보 정책을 결정해 온 것은 치명적이라고 지적했다. [중앙포토]

-이런 국제적 도전 속에 한국의 컨트롤타워는 공백 상태다.


“한시라도 빨리 박근혜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외교안보 정책 결정과 이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통령의 리더십이고 생각이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토론하지 않고 결정을 내린다는 건 치명적이다. 미국 같은 대국, 실수해도 회복이 가능한 나라도 안보 사안은 핵심 장관들의 난상 토론을 거친다. 대통령은 외교안보의 천재가 아니다. 대국도 집단 지성의 지혜를 도출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우린 작은 나라이고, 분단국이고, 북한을 이고 사는 상시적인 안보 위기의 나라다. 우리는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의 말을 받아 쓰기에 바쁘다.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 북한 도발 등 난제가 눈앞에 쌓인 상황에서 이렇게 1년을 더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2선 후퇴든, 사퇴건 한시라도 빨리 그만두는 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길이다. 대통령의 스타일, 참모들과의 수직적인 관계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쇄신이 불가피한 이유다.”


윤 교수는 그간 정부가 사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추진하는 과정에 대해 “3년 8개월간 일관되게 잘못했다”고 지적했다. “난상 토론으로 걸러진 정책을 국민들에게 설명하면 국민들은 따른다. 여론 눈치를 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드 배치한다’, 어느 날 갑자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한다’, 어느 날 갑자기 ‘개성공단 철폐한다’고 하면 그게 설사 국익을 위한 옳은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국민들이 따라줄 수가 없는 거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초보적 군사협력이고 북한을 공동대응하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크게 걱정할 사항이 아닌데 처리 방식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국익에 플러스가 된다면 정부가 당당하게 국민을 향해 설득 노력을 하면서 정면 돌파했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 초대 외교장관으로, 소위 ‘자주파’와 ‘동맹파’ 갈등 끝에 사임했다. 한국 사회는 외교안보 이슈를 놓고 항상 둘로 나뉜다.


“국내 정치 진영 논리로 외교안보를 보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 상대 정책은 100% 틀렸다고 한다. 100% 맞고 틀린 외교안보 정책은 없다. 미국 공화·민주당의 대중국 외교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협력할 건 하고, 어떤 상황에도 대비해 적절히 관여하고 견제하는 ‘헤징(Hedging)’ 정책을 쓴다. 우리는 수렴 여지가 충분한데도 아예 들여다보질 않는다. 독일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82년 연립정부를 세우고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채택했다. 기민당이 강조해 온 서방 우방들마저 관심사는 독일의 분단 관리, 즉 현상 유지에만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상 변화 모색은 독일 사람들이 나서서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동방정책을 취했다.”


윤 교수는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외국에 나가서 자국 상대 진영을 비판하는 경우는 없다”며 “우리 국력의 몇 배가 되는 나라들도 외교안보 분야에선 여야 없이 힘을 합하는데, 분단된 작은 나라가 외교안보 이슈를 놓고 갈라져서 싸우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수정 국제선임기자 km.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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