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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오름기행] 바람이 분다 억새가 흔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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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오름기행 <17>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 기슭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 너머로 지는 해가 곱다.

따라비오름 기슭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 너머로 지는 해가 곱다.
따라비오름 기슭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 너머로 지는 해가 곱다.
따라비오름 기슭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 너머로 지는 해가 곱다.

바람이 분다. 허한 마음에 쓸쓸한 풍경 하나 지나간다. 돌아보니 늘 그랬다. 굳이 해가 이울 때까지 기다려 여기에서 바람을 맞았다. 여기, 그러니까 따라비오름 꼭대기에 올라서면 제주의 바람이 보인다. 지금은 돌아간 어느 사진쟁이가 10년쯤 전에 해준 얘기다. 기다리면 보인다고, 그는 분명히 말했다. 겨울 들머리 따라비오름에 올라 바람을 맞는다. 아니 바람을 바라본다. 한라산 너머로 해가 진다.

억새, 바람 그리고 그 남자

가시리 조랑말 승마체험장에서 바라본 따라비오름.

가시리 조랑말 승마체험장에서 바라본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은 큰 오름이다. 표고 324m 비고 107m로 제주도 동쪽 중산간 오름 군락지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둘레 2633m로 덩치도 크다. 따라비오름은 다랑쉬오름ㆍ영주산 등과 함께 동부 중산간 오름밭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오름이다. 따라비오름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속한다.

표선읍 가시리는 중산간 마을이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이 마을에 조선시대 최고 등급의 말을 키우는 갑마장이 있었다.

표선읍 가시리는 중산간 마을이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이 마을에 조선시대 최고 등급의 말을 키우는 갑마장이 있었다.

 따라비오름은 대표적인 가을 오름이다. 오름 자락은 물론이고 주변 중산간이 죄 억새밭이다. 어른 키보다 큰 억새가 가을이면 거대한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이 거대한 초원에서 옛날에는 말을 풀어놓고 길렀다. 따라비오름을 품은 가시리에 조선시대 갑마장(甲馬場)이 설치됐던 건 우연이 아니다. 갑마장은 조선시대 최고 등급의 말을 기르는 목장을 일컫는다. 그러나 불과 3∼4년 만에 일대 억새밭은 크게 훼손됐다. 아니다. 표현이 잘못됐다. 쓸모없는 억새 따위는 베어 버리고 제주 중산간은 효용의 가치를 따라 탈바꿈하고 있다. 난개발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쓰지 않겠다.

따라비오름은 작은 분화구 3개가 붙어 큰 분화구 하나를 형성한다. 산마루에 오르면 분화구 능선이 빚어내는 관능적인 곡선을 마주할 수 있다.

따라비오름은 작은 분화구 3개가 붙어 큰 분화구 하나를 형성한다. 산마루에 오르면 분화구 능선이 빚어내는 관능적인 곡선을 마주할 수 있다.

그래도 따라비오름은 가을 오름이다. 능선은 물론이고 굼부리(분화구) 안쪽과 바깥쪽 모두가 억새로 덮여 있다. 제주도에는 억새 명소로 알려진 오름이 수두룩하지만, 따라비오름처럼 여행자를 압도하는 오름은 없다. 뭐랄까. 따라비오름에 바람이 불면 세상이 흔들린다.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휘청거리는 것은 억새뿐인데, 따라비오름에 오르면 마음이 흔들린다. 그 아찔한 기분이 그리워 이맘때면 꾸역꾸역 따라비오름을 오른다.

따라비오름 능선의 억새밭. 어른이 파묻힐 정도로 키가 크다.

따라비오름 능선의 억새밭. 어른이 파묻힐 정도로 키가 크다.

다만 아쉬울 따름이다. 몇 해 전에는 따라비오름에서 내려다보는 중산간이 온통 억새로 출렁였지만 지금은 흙이 더 많이 보인다. 몇 해 뒤에는 흙 대신에 콘크리트 건물이 보일 테지만 말이다. 10년도 전에 따라비오름의 가을을 알려준 고(故) 김영갑(1957∼2005)이 오늘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예의 그 질펀한 욕을 내뱉었을 터이다. 차라리 잘 된 일일지 모르겠다. 생전의 김영갑은 눈꼴 시린 건 못 보고 사는 성격이었다.

 ‘따라비’라는 이름이 영 얄궂다. 꽤 흥미로운 전설이 내려온다. 따라비오름의 한자 이름이 지조악(地祖岳)이다. 할아버지 오름이라는 뜻인데, 그럼 아들 며느리는 물론이고 손주도 있어야 앞뒤가 맞는다. 놀랍게도 온 가족이 주변에 모여 산다. 우선 따라비오름 북쪽에 새끼오름(301m)이 있다. 병아리 추 자를 써 추악(雛岳)이라고 한다. 병아리처럼 작은 오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도 낮고 평퍼짐한 동산처럼 생겼다. 따라비오름의 둘째 아들이다. 따라비오름 동쪽에는 모지오름(306m)이 있다. 원래는 모자봉(母子峰)이었다고 한다. 높지는 않지만 품이 넓다. 무엇보다 어미가 아이가 안은 것처럼 생겼다. 따라비오름의 며느리 오름으로 통한다. 모지오름 바로 옆에는 장자오름(215m)이 있다. 한자로 장자봉(長子峰)이니까, 큰아들 오름이라는 뜻이다.

손자오름도 있다. 따라비오름에서 약 10㎞ 거리에 정말로 손자오름(255.8m)이 있다. 손자봉ㆍ손지오름ㆍ손지봉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모두 손자(孫子)에서 비롯됐다. 이들 오름이 모두 따라비오름의 가족이다. ‘땅하래비’를 뜻하는 ‘따애비’가 ‘따래비’가 됐다가 따라비로 굳어졌다는 풀이가 제일 유력하다. 이름의 내력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지만, 주변 오름이 가족으로 등장하는 풀이는 할아버지 오름뿐이다.

억새, 바람 그리고 그 남자

따라비오름 정상 능선에 설치된 의자. 한라산을 바라보고 의자가 놓여 있다.

따라비오름 정상 능선에 설치된 의자. 한라산을 바라보고 의자가 놓여 있다.

따라비오름은 오르는 오름이다. 따라비오름도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만, 특히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이 제일 곱다고 하지만 따라비오름은 일단 오르고 봐야 하는 오름이다. 탐방로도 잘 돼 있고 군데군데 이정표도 서 있어 일부 가파른 구간이 있다 해도 어렵지 않다. 오름 입구에서 쉬엄쉬엄 4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굼부리 기슭에서 소가 풀을 뜯어 먹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이 찾아서인지 오름 주변에서 소는커녕 소똥도 구경할 수 없었다.

따라비오름 능선이 빚어내는 다양한 형태의 곡선들. 언뜻 용눈이오름을 닮았다.

따라비오름 능선이 빚어내는 다양한 형태의 곡선들. 언뜻 용눈이오름을 닮았다.
따라비오름 능선이 빚어내는 다양한 형태의 곡선들. 언뜻 용눈이오름을 닮았다.

능선 위에 올라서면 비로소 따라비오름의 독특한 생김새가 눈에 들어온다. 둘레 855m의 커다란 굼부리 안으로 3개의 작은 굼부리가 들어가 있다. 이들 굼부리에서 뻗어나온 능선이 다른 굼부리와 만났다가 헤어지며 기하하적인 주능선을 그린다. 선과 선이 이어져 하나의 선이 되기도 하고, 하나의 선이 여러 선으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언뜻 용눈이오름의 관능적인 곡선이 연상되는데, 구릉 모양인 용눈이오름과 달리 우람한 산의 형채인 따라비오름은 정상까지 올라가야 꼭꼭 숨겨놨던 곡선을 드러낸다. 그 요염하고 매혹적인 곡선을 따라 억새가 춤을 춘다.

따라비오름 오르는 길. 오름 일대가 억새 출렁이는 초원이다.

따라비오름 오르는 길. 오름 일대가 억새 출렁이는 초원이다.
따라비오름 오르는 길. 오름 일대가 억새 출렁이는 초원이다.
따라비오름 능선이 빚어내는 다양한 형태의 곡선들. 언뜻 용눈이오름을 닮았다.
따라비오름 능선이 빚어내는 다양한 형태의 곡선들. 언뜻 용눈이오름을 닮았다.

 ‘내가 살았던 중산간 마을도 주변이 온통 억새밭이다. 5월이면 억새의 새싹이 나온다. 6월이면 제법 빠르게 자라고, 7월이면 잎이 억세어지고, 8월이면 키가 2m 가까이 자란다. 9월이면 꽃대가 굵어지고, 10월이면 꽃이 피고, 11월이면 꽃이 붉은색에서 하얗게 변해간다. 12월이면 꽃들이 바람에 날려 앙상한 줄기만 남는다. 겨우내 눈과 바람에 시달려도 억새는 바람이 떠미는 방향으로 눕지 않는다. 바람은 다시 봄이 올 때까지 초원의 억새들과 장난질을 한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79쪽.

김영갑은 제주의 바람을 찍다 간 사진작가다. 제주의 그 심술 궂은 바람을 김영갑은 사랑했다. 그래서 바람을 품에 안고 사는 중산간에서 18년을 떠돌았다. 생전의 김영갑이 알려준 비경 중 하나가 여기 따라비오름이었다. 가을이면 꼭 가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미 병세가 중해 함께 오르지는 못했지만(그는 온몸의 근육이 마르는 루게릭 병을 앓았다) 그는 따라비오름의 가을을 눈에 보이기라도 하듯이 생생하게 설명해주곤 했다.

김영갑처럼 사시사철 억새를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가을이면, 김영갑의 말마따나 꽃이 피고 꽃이 하얘지고 바람에 날리는 계절이 오면 따라비오름을 오르거나 근처 중산간을 헤메곤 했다. 그리고 김영갑이 그랬던 것처럼 바람을 마주봤다.

따라비오름 기슭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 너머로 지는 해가 곱다.

분화구 아래에서 바라본 석양.

따라비오름 정상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풍력발전기 13기가 눈엣가시처럼 걸렸다. 몇 해 전에는 없던 시설이다. 그래도 한라산 너머로 지는 석양은 그대로였다. 오늘도 바람은 모질었다. 여러 번 휘청거렸으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억새가 바람에 맞서는 법을 곁눈질로 배운 참이었다. 못 이기는 척 허리를 굽혀주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정보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는 주민 약 1200명의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아주 큰 마을이다. 표선면 전체의 41.4%를 가시리가 차지한다. 남북으로 31㎞ 동서로 73㎞나 뻗어 있다. 제주도 동쪽의 대표적인 중산간마을로 주요 수입원은 감귤이다. 인적 드물었던 가시리가 요즘은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명품 마을로 거듭났다. 2010년부터 각종 지원사업이 진행돼 다양한 시설이 들어섰다. 갑마장이 있던 마을답게 말을 주제로 한 시설이 많다. 조랑말 체험공원(체험승마 7000원. 070-4145-3456)도 있고, 따라비오름∼큰사슴이오름∼유채꽃프라자를 잇는 9㎞ 길이의 갑마장길도 있다. 가시리는 돼지고기가 맛있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나목도식당(064-787-1202)·가시식당(064-787-1035)처럼 읍내에 유명한 돼지고기 집이 몰려 있다. 가시리사무소. 064-787-1305.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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