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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민정을 몰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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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병섭 서울대 교수 국가리더십센터 소장

김병섭
서울대 교수
국가리더십센터 소장

있을 수 없는,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되는 국정 문란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이러다 결딴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 양 측면 모두 발전을 이룩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자랑스러운 나라가 말이다. 그때마다 이 사태를 초래한 대통령과 그 주변 세력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도대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직자, 특히 정무직 공무원들은 무엇을 했는가. 이른바 ‘듣보잡’들에게 아부해 고위직을 꿰차고 공직 사회를 공황 상태로 만든 자들은 모두 응분의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울러 국정 농단과 일탈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적 및 사후적 통제를 그 목적으로 하는 각종 사정 시스템, 가령 검찰·경찰·국정원·감사원·각 부처 자체 감사실은 무엇을 했는지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정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대통령과 민정수석이 민정(民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위정자는 민심을 살피는 것(察民情)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특히 현명한 군주는 여러 사람의 지려(智慮)가 한 사람의 뛰어난 성인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다. 즉 필부(匹夫) 필부(匹婦)는 아는 것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한 사람씩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리석어 보이지만 이들이 모여서 내는 하나의 목소리는 성인의 이야기보다 낫고 하늘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여론조사라는 것이 없던 시절에도 공론(公論)으로 통치를 한 것이다. 또한 현명한 군주는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엎을 수도 있는 것처럼 군주가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굳건해지지만 잃으면 위태로워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백성의 마음을 따르려고 했지 감히 백성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따르도록 하지 않았다. 특히 백성이 가지는 원한과 분노의 감정은 그 단서가 매우 미미하지만 그것이 극에 이르게 되면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이 백성을 대할 때는 썩은 새끼줄로 여섯 마리 말을 몰 듯 조심했고 백성의 사정과 형편을 살피는 것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오늘날 민주공화국에서는 왕조 시대보다 이러한 민정의 중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대통령실에 민정수석을 두고 검찰·경찰·국세청 등 사정기관을 총괄하면서 이들로부터 올라오는 민심을 대통령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검사 출신 민정수석이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민심을 전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왜곡해 국정 문란과 파탄을 초래하게 했다. 사정기관들이 국정을 정의롭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비선 실세의 사적 이익 추구를 권력을 이용해 도와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 검찰은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하고 있어 없는 죄도 만들고 있는 죄도 없게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란 비판을 받는다. 이번에도 권력을 이용해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을 근거 없는 의혹으로 만들려 애써 왔다. 2014년 소위 정윤회 파동 때 박근혜 대통령은 외부로 유출된 청와대 문건을 ‘찌라시’라고 하면서 의혹을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단정했다. 그 뒤 검찰은 정말 대통령의 가이드라인 그대로 ‘혐의 없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검찰을 장악하면 불법 행위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최순실과 그 일당들은 미르·K스포츠 재단을 포함한 국정 농단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미르재단 이성한 전 사무총장이 대기업 돈을 거두면서 꺼림칙해서 걱정을 토로하자 차은택이 우병우 민정수석의 명함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봐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검찰을 장악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은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인사권과 민정수석을 통해 검찰을 장악하고 있다고 여긴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9월 22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비선 실세에 대한 의혹 제기를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이라 규정했다. 검찰 출신 황교안 국무총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9월 23일 이러한 “불법에 해당하는 유언비어는 의법 조치도 가능한 것”이라며 법적 대응까지 시사했다. 10월 24일 JTBC 보도가 없었더라면, 대통령→민정수석→검찰로 이어지는 일사불란한 사정 체계 덕분에 더 큰 국정 농단이 생겨도 우리는 아마 확인되지 않는 비방을 계속할 뻔했다.

바꾸어 말하면, 정윤회 사건 때 검찰이 이를 제대로만 수사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참혹한 상황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검찰이 정권 초부터 제 역할을 다했더라면 정윤회 사건도 발생하지 않아서 검찰도 살고, 박근혜 대통령도 살고, 나라도 살았을 터이다. 민정의 중요성과 무서움을 몰랐던 대통령과 이를 왜곡한 검찰 때문에 나라가 거의 결딴나고 있다. 민정수석과 검찰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전면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5년마다 반복되는 국가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김 병 섭
서울대 교수
국가리더십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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