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트럼프의 미국과 세계, 고립주의로 회귀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우정엽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우정엽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1년 넘게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었던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이라는 의외의 결과로 마무리됐다. 트럼프 진영의 환호만큼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의 충격이 크다. 클린턴은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도 다음 날로 미뤘다. 세계 증시와 외환시장도 급락하며 뜻밖의 결과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자국 우선, 보호무역 주장해 당선
양극화 등 신자유주의 후유증 탓
브렉시트 이어 세계 확산 우려
내년 독·프 선거에도 영향 줄 듯

국제사회는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를 어느 때보다 걱정스럽게 지켜봐 왔다.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부상하는 과정부터 그랬다. 단순히 그의 유명세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국제사회에 대해 가지는 시각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클린턴과의 선거전도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는 진지한 정책적 논의 대신 서로에 대한 저급한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메워졌다. 상대 후보에 대한 비난이 격렬해지면서 미국은 둘로 나뉘었고, 후보 간의 공박이 저급해질수록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는 추락했다. 이제 선거는 끝이 났지만 질문은 남았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리더의 위치를 유지할 것인가? 혹시 리더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 자체가 약해진 건 아닌가? 국제사회의 이런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 서둘러 답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 후보는 여러 추문과 개인적 자질 논란에도 불구하고 경합주를 거의 모두 휩쓰는 위력을 선보이며 당선됐다. 이는 상대인 클린턴 후보가 미국 사회에 대해 긍정적 메시지를 제시하며 적극적 지지층을 형성하지 못한 탓이다. 어떤 미국을 만들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클린턴이 기대한 만큼 소수 인종들이 투표장으로 나오지 않았던 게 한 방증이다. 오히려 트럼프의 자격 논란,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말 높은 인기, 트럼프 후보와 공화당의 분열에 의존한 선거를 함으로써 트럼프의 승리를 가능케 했다. 이에 비해 트럼프는 미국인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했다.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다. 눈에 띄게 나아지지 않는 경제 상황과 양극화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계속 강조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우려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이 추구했던 고립주의가 다시 미국의 주요 기조가 되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어 보인다. 선거전 내내 트럼프는 미국이 왜 큰 비용과 희생을 감수하며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해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비단 이는 트럼프만의 기조가 아니었다.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와 맞섰던 테드 크루즈 역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민주당에서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역할 축소를 주장했다.

이런 배경에는 이라크 전쟁의 후유증, 금융 위기의 여파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의 적극적 역할보다 국내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미국민의 태도가 급격하게 바뀐 것이다. 다른 나라들처럼 미국도 2000년대 이후 양극화와 전통 산업의 위축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후유증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미국 정치는 그 문제를 제대로 논의할 타이밍을 놓쳐왔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2008년과 2012년 대선의 주된 프레임은 계층이 아닌 인종이었다. 결국 신자유주의에서 파생된 계층 간 갈등이 정치적으로 표출되거나 해소되지 못한 채 억눌려 있다가 이번 선거를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된 것이다.

더욱이 트럼프가 속한 공화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당 지위까지 유지했다. 트럼프의 고립주의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는 우려가 당연히 제기된다. 하지만 트럼프는 공화당 주류와는 척을 졌다고 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다. 현재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자본도 매우 빈약한 상태다. 그가 후보 시절 언급했던 여러 돌출적인 정책이 빠른 속도로 정책화할 가능성은 우려만큼 크지는 않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해도 미국의 이익 때문에 개입을 피할 수 없는 국제사회의 현안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당선을 이끌어낸 고립주의와 국수주의 기조는 꾸준히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 큰 우려는 고립주의의 세계적 확산이다. 몇 달 전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했다. 1979년 집권한 대처 총리가 주창하고 80년 레이거노믹스로 확산된 신자유주의가 정확히 같은 순서로 부정되고 있다. 더구나 30년 전 신자유주의를 추진했던 보수정당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는 내년에 치러질 독일과 프랑스의 총리·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제사회에 대한 선진국의 전략적 태도가 지금과는 매우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이미 단일체로서의 유럽의 영향력은 매우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틈에 러시아는 다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등에서 패권을 강화하려 한다. 북한·시리아·이슬람국가(IS) 문제라는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모두 일관성과 국제 공조가 필요한 사안이다. 이런 면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불확실성의 해소라기보다 또 다른 불확실성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대선은 끝났지만 미국의 갈 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우정엽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