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의 벽"이 흔들리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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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는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일하고 싶다」 는 세대와 「나도 웃사람들처럼 제때 제때 승진해야겠다」 는 세대의 이해관계는 쉽게 조화될 수 없다.
여기에 「적은 봉급을 주고도 참신한 인력을 쓸수가 있는데 직장이 어디 양로원이냐」 는 조직의 이해까지 얽히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정년연장의 문제는 바로 이 같은 3음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다.
지난날 우리사회에 일본식의 연공서열제가 도입되며 일반적으로 그어진「55세정년」이 그간 큰 논란 없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같은 굳은 통념이 되어버린것은 그만큼 정년문제를 거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세대간의 「파워 게임」 이며, 조직과 조직 구성원의 이해대립과 얽히게된다.
그러나 이제는 당장 골치가 아프다하여 더이상 정년의 문제를 외면할수 없는 때가 되었다.
「굳어진 정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 60년대의 일본보다는 덜 하다하지만 노년세대의 수와 파워가 동시에 커지는 인구의 고령화추세가 우리 사회에서도 뚜렷하게 가속화하고 있으며,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나이든 세대의 활력과 그들 자신의「일」에 대한 기대치가 예전에 비해 월등히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정년의 벽」을 열심히 두드리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최근 경제기획원이 정부투자기관의 정년을 60세까지로 유도해나간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나, 올해부터 행정주사급 이하의 공무원 정년이 55세에서 58세로 늘어난 것이 바로 정년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한 조짐이다.
사실 이같은 「관주도」 의 정년연장은 민정당이 선거를 잘 치르기 위한 복안의 하나로 정년연장을 이미 꼽아놓았던 것이 중요한 동기가 되었지만, 인구의 고령화와 수명연장이 정년연장의 문제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별표에서 보듯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눈에 띄게 늘고있고, 이에 따라 전체인구의 나이든 경도를 짚어보는「노령화지수」도 매년 높아지고 있다.
인구가 나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나이 든 사람들의 생계와 일자리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수 없다.
우리처럼 이제야 연금제를 막도입하려는 사회에선 더욱 그같은 문제가 절실해진다.
경제기획원의 예측에 따르면 오는 2000년에는 한국인 남자의 평균수명이 69·3세에 이르는데, 5세에 일손을 놓고 거의 15년을 일없이 지내야한다는 것은 생계문제를 떠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지난 80년의 인구센서스자료에 따르면 전체 남자중 7·7%인 1백43만5천명이 55세 이상인 사람들이었다.
이중 55∼59세는 52만2천명, 60∼64세는 37만3천명.
60세에 직장을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일본의 정년개념으로 본다면 우리사회에는 적어도 52만2천명이나 되는 「노인아닌 노인」들이 집에서, 또는 거리에서 하일 없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은 대개 60세에 은퇴를 하게돼 있는 대신, 55세를 넘기면서부터는 「촉탁」 이라 하여 핵심적인 업무에선 손을 떼고 자신들의 오랜 경험을 살린 지혜를 조직을 위해 활용하는 일을 맡는다.
창가로 밀려났다하여 「마도기와」(창제)족 이라고도 불리는 이들 노년직장인들은 55세를 정점으로 그 이후에는 해마다 봉급이 줄어든다.
정년을 60세까지로 늘리면서 노년세대와 젊은 세대, 그리고 조직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키기 위한 타결점을 봉급체계 조정에서 찾는 것이다.
구미 선진국의 경우는 일본과 또 다르다.
영국 정부의 한 통계에 의하면 약 1세기 전인 지난 1881년만 해도 65세를 넘긴 영국인중 73%나 되는 사람들이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것이 요즘에 와서는 65세이상 인구중 취업자의 비율은 11%줄어들었다.
「정년」 이 아닌 「은퇴」의 연령기준이 요즘의 영국에서는 65세 안팎으로 「젊어졌다」 는 사실을 말해주는 통계인데, 영국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어 「일하는 나이」를 다시 늘려가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은퇴한 노년들이 타가는 연금이 나라경제 전체에 큰 부담이 되고있기 때문인데, 일하는 나이를 늘리기 위해 중년직장인들에 대한 새로운 직업교육을 확대해야하며 은퇴 직전의 마지막 봉급수준을 기준으로 매기게돼 있는 연금산출방식도 직장에서의 「평생공헌도」를 기준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상황은 이같은 외국의 예에 비하면 사뭇 뒤떨어져 있다.
민간기업에서는 정년 55세가 거의 일반화된 철칙이 되어있고, 정부투자기관들은 정년의 문제보다는 인사정체의 해소가 당장 더욱 급한 난제다.
민간기업에서도 「안정된 직장 보장」 의 문제에 가려 정년문제가 뒷전에 밀려있기는 마찬가지다.
정년까지 가기전에 떨려나는 일이 잦으니 정년을 문제삼을 처지도 못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85년 현재 전산업 남자 근로자들의 평균 근속년수는 4년4개월로 놀랄만큼 짧다. 이는 물론 직장 이동이 유난히 잦은 생산직근로자들도 포함된 것이고, 또 직장을 옮기는 것이 모두다「타의」는 아니라는 것도 감안해야하지만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 「정년이전」의 문제가 「정년이후」 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하위직 공무원과 정부투자기관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정년연장의 문제가 아무리 선거를 앞둔 여당의 복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 간단히 풀릴 수 없는 것은 바로 이같은 우리의 현실때문이다.
산은의 예를 들면 지난 78년에 입행한 대졸행원 22명이 지난 85년에 이미 대리진급시험에합격하고도 자리가 비지 않아 아직껏 한명도 진급을 못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년을 다시 연장한다면 「진급대기」세대의 거센 반발이 있을 것은 당연하다.
비슷한 경우로 도공·토개공등 건설부산하기관들은 부장급 정년을 60세로 늘렸다가 인사정체 때문에 최근 다시 58세로 줄였다.
또 지금과 같은 연공서열식 봉급체계와 퇴직금 산정방식을 그대로 놓아둔채 정년만을 연장한다는 것은 조직의 인건비 부담상 불가능하다.
어쨌든 정년의 문제는 제기되고 있다. 정년의 벽을 허물려는, 또 기존의 정년을 계속 고수하려는 각 계층의 입장과 사회·경제적인 현실등을 감안하면 결국 정년연장의 문제는 「가치판단」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경제적인 비용이나 어느 한 계층의 이익만을 따질수 없는 우리 모두의 「삶」 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건비 부담이나 승진·인사정체 문제등의 해결은 그 같은 「가치판단」 이후의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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