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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대통령, 민심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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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근혜 대통령이 2일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신임 총리로 전격 지명했다. 야 3당이 제시해온 대통령 사과와 수사의지 천명→청·여·야 회동→여야 추천→책임총리→거국내각 로드맵을 완전히 무시하고, 여당과도 상의 한마디 없이 단행한 ‘과속’ 개각이다.

야당 무시하고 일방적 총리 지명
독선 못 버린 방증 … 파국 불 보듯
‘꼼수개각’ 대신 수사 자청해야

 야당이 총리 인사청문회를 전면 보이콧하고, 금기시해온 ‘하야’까지 거론하며 반발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엔 현직 대통령의 하야란 최악의 사태만은 피하자는 암묵적 공감대가 있었다. 국정 농단 의혹의 진상 규명과 대통령 사과를 전제로 중립내각을 출범시켜 위기를 수습하는 방안이 여론의 지지를 받아온 이유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일방적인 총리 지명으로 거국내각 복안은 사실상 무산됐고 정국은 극도의 혼돈에 빠지게 됐다. 이렇게 사태를 악화시킨 책임은 전적으로 박 대통령에게 있다. 성난 민심을 달래 남은 임기를 마칠 골든타임을 대통령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주 원로들을 두 차례나 청와대에 초청해 조언을 들었다. 원로들은 “검찰 수사에 적극 응하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겠다고 선언하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런 요청에 귀를 닫고 일방적인 총리 지명으로 응수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원로들을 불러 듣는 시늉을 했는지 의문이다.

 JTBC 보도로 ‘최순실 문건’이 폭로된 지 열흘이 넘었다. 그동안 대통령이 한 일이라곤 ‘90초 사과’와 진작 경질했어야 할 비서진 사표수리에 이어 ‘과속’ 개각뿐이다. 지금 국민 가운데 개각에 관심 갖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대통령과 최씨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최씨의 국정 농단에 대통령이 얼마나 개입했는지, 혹은 대통령 본인이 농단을 주도한 것은 아닌지에 모든 눈길이 쏠려 있다. 이런 의혹들을 해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전에는 그 무슨 눈가림의 조치로 파문을 덮으려 해도 헛수고일 뿐이다.

 청와대는 “정치권이 요구한 중립내각 취지를 살리기 위해 김 총리 지명자를 발탁했다”고 밝혔다. 어이가 없다. 중립내각의 참뜻은 대통령이 권력을 내려놓고, 여야 합의로 임명된 총리가 독립적인 내각을 구성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다. 여야의 ‘협치’가 중립내각의 요체다. 그러나 대통령은 야당과 일언반구 협의 없이 총리 지명을 단행했다. 권력을 내려놓을 뜻이 없음을 드러낸 이런 행태 자체가 중립내각의 취지를 정면으로 짓밟은 것이다. 지난 3년반 동안 민심을 무시하고 독주해온 박 대통령이 아직도 오만·불통·일방주의를 버리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김 총리 지명자의 말바꾸기도 논란거리다. 그는 지난달 30일 중앙SUNDAY 대담에서 “대통령은 뒤로 물러나고, 국회에서 선출한 총리가 내치를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랬던 사람이 며칠 만에 입장을 뒤집어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지명한 총리직을 수락했으니 어안이 벙벙하다. 청와대는 김 총리 지명자에게 국무위원 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보장할 것이라고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당장 박 대통령은 김 총리 후보자 지명을 발표하면서 경제부총리·국민안전처 장관 후보도 함께 발표했다. 대통령이 도덕적 권위와 정당성을 완전히 잃은 마당에 “인사권은 대통령에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김 총리 지명자는 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총리와 정책실장을 지냈고 박승주 국민안전처 장관 지명자도 노무현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차관을 지냈다. 또 박 장관 지명자와 임종룡 경제부총리 지명자는 호남 출신이다. 노무현·호남 인사를 통해 쇄신 의지를 보이겠다는 의도인 모양이지만 국민의 눈에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시간 끌기와 국면전환용 꼼수 개각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지금 할 일은 이런 꼼수 개각이 아니라 모든 의혹의 투명한 진상규명과 성역 없는 검찰수사를 약속하는 것이다. 각본 없는 기자회견을 통해 본인 입으로 그동안 제기된 의혹들을 낱낱이 해명해야 한다. 검찰의 대면조사에도 성실히 응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고 총리 지명을 밀어붙인다면 파국이 불 보듯 하다. 1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대통령 하야’에 동의하는 응답자가 67.3%에 달했다. 게다가 대통령의 총리 지명을 놓고 여당 의원들조차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국회에서 총리 인준 동의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이유다.

 이번 사태의 핵심 피의자는 박 대통령 본인이다. 최씨가 기밀문서를 멋대로 들여다보고, 정부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대기업을 등쳐 수백억원을 뜯어내는 전횡은 대통령의 방조나 묵인 없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을 둘러싼 비리는 친인척들이 대통령을 팔아 저지른 것들인 반면 이번 사태는 대통령 본인이 직접 연루된 정황이 너무나 뚜렷하다.

 최씨와 비서진 몇 명을 수사하고, 야권·호남 인사를 기용하는 선에서 적당히 상황을 매듭짓겠다는 건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민심과 싸워 이기는 권력은 없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민심과 싸우는 길을 택했다. 이런 ‘오기정치’로 헌정사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난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박 대통령이 져야 함을 명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