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뚜껑 여니 빠진 ‘미 전략자산 순환배치’…한·미 엇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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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구 국방부 장관(오른쪽)과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이 20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 펜타곤에서 열린 제48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를 마치고 공동 보도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

미국 현지시간 20일 오전 9시 펜타곤(국방부). 워싱턴의 포토맥강이 바라보이는 펜타곤의 출입구 앞에 검은색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서버번 2대가 멈춰 섰다. 미 해군 소속의 방탄 차량이었다. 뒷문이 열렸다. 차에서 내리는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출입구 계단 위에서 기다리던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을 발견하곤 잠깐 웃음을 보냈다. 하지만 10분여 동안 진행된 의장(儀仗·환영)행사 내내 한 장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미국, 중 반발에 결심 쉽지 않은데
한국, 공격용 전략무기 배치 추진
발표 전날 “실무 합의” 성급한 발언
한민구 장관 “전략적 모호성 필요”

한 장관의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는 2시간30분여 뒤 기자회견에서 밝혀졌다. 양국 장관은 교대로 이날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의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공동성명은 18개 항목, A4 용지 6장 분량이었다. 성명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가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임을 규탄했다. ▶북한의 추가 도발에 대응하기 위한 긴밀한 협조 ▶주한 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해군 협력 강화 등의 내용도 담겼다. 북한 미사일과 관련한 정보 공유 강화 의지도 다졌다. 한·미 양국 현안이 대부분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이 기대했던 핵심이 빠졌다. 미국의 핵잠수함,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을 한반도에 상시적으로 순환 배치하겠다는 합의다. 상시적 순환배치는 미군 전략자산이 늘 한반도 해상이나 상공에 머무는 걸 뜻한다. 하지만 성명엔 “양국 국방장관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한반도와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한·미 동맹과 미국 확장억제력의 강력함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표명했다”가 전부였다.

정부 당국자는 “방어용 무기인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반발은 물론 공격용 전략무기의 효용성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이 그 비싼 무기를 한반도에 고정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부터 새누리당 일각에선 자체 핵무장론이나 전술핵 재배치론이 고개를 들었다. 지난달 9일 5차 핵실험 이후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유지한다”는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전략무기 순환배치 같은 강력한 억제력을 내심 기대했기 때문이다.

전날 국방부 당국자들은 “미 전략무기 순환배치 문제가 어떤 표현으로든 공동성명에 들어갈 것”이라며 “미국과 최종 조율 중에 있고, 실무적으로 합의가 됐다”고 자신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도 기자회견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기대를 부풀렸다.

그러나 한 장관은 기자들에게 “앞으로 (미 전략무기 순환배치는) 검토될 것”이라고만 답했다. 이번 회의에서 합의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발언이다.

회담 관계자에 따르면 카터 장관도 원론적으로는 한국 정부의 의견에 찬성했다고 한다. 다만, 미측은 “현재의 전력으로도 충분한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고 한국의 요구를 명문화할 경우 한·미의 대응책이 그것밖에 없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북한에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결국 SCM 뒤 국방부는 “무엇을 배치한다는 것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전략적이지 못하다”며 말을 바꿨다. 한 장관은 “전략적 모호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국방부 당국자들은 무엇 때문에 하루 전까지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상시 배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나.

워싱턴=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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