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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시각각

무중력 탁구를 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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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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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논설위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가상현실(VR) 삼매경에 빠져있는 듯한 한 장의 사진이 최근 많은 이에게 여운을 남겼다. 그가 VR 기어를 통해 감상한 것은 미국 요세미티국립공원을 360도로 촬영한 일종의 홍보 영상물이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이 VR 기기를 통해 무중력 탁구 경기를 하는 모습은 즐거운 상상이다.

 지난해부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VR 산업의 매력은 무엇일까.

 정보기술(IT)과 실생활의 융합인 VR의 장점은 콘텐트에 대한 몰입도가 다른 기기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게임회사들은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 선점을 위해 VR 콘텐트 제작에 자본과 기술을 쏟아붓고 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이비인후과나 신경 관련 수술 분야의 실습용으로도 VR이 이용되기도 한다. 고소공포증·폐쇄공포증 치료를 위해 가상의 현실을 만든 뒤 이에 적응하는 훈련용으로도 VR은 강점을 갖고 있다. 이미 일부 병원에서는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 구글을 비롯해 페이스북 등 유수의 기업들이 좀 더 진화된 VR 산업을 선보일 경우 세상은 또 한번의 놀라운 경험을 할 것이다.

 VR이 게임용에서 벗어나 우리의 일상생활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는 것은 단순히 산업적 측면 때문만이 아니다. 인류의 가장 큰 바람 중 하나인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놀이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상상만 하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근사함이 느껴진다.

 중세시대의 유럽으로 넘어가 수도원의 엄숙함을 맛보고, 18세기의 괴테를 만나고,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피오르의 대자연을 느끼는 것이 VR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자유를 끄집어내 마음껏 시간과 공간을 쏘다닐 수 있는 것이 VR의 세계다.

 우리 VR 산업의 현주소는 어떨까.

 게임산업은 중국과 힘겨운 경쟁을 이어가며 그럭저럭 선전하고 있지만 나머지 콘텐트는 미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등이 VR용으로 뉴스 콘텐트를 만들고 있지만 우리는 비싼 비용과 창의력 부족 등으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 정부가 직접 나서 VR 산업에 붓고 있는 마중물도 획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과 SNS 등에는 오바마가 VR 기기를 끼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진을 패러디한 합성물이 계속해 돌아다니고 있다. 특히 젊은 여성이 오바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 광경을 빗대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청와대 참모들이 경직된 모습으로 서서 책상에 앉아 서명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진을 보면서 창의력과 상상력을 짐작할 수 있을까.

 초보적 형태의 타임머신으로도 불릴 수 있는 VR을 통해 나는 옛 성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제자들이 짚을 이으며 학문과 기술, 창의력에 대한 질문을 했다.

 “학문과 기술은 인간의 기억이다. 기억은 영원히 존재하고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불씨를 보존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극진히 살피고 지켜야 한다. 군주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이다. 원천은 상상력이다.”

 VR이 주는 어지러움에 기기를 벗으니 대한민국의 현실이 펼쳐졌다.

 격한 정치적 구호와 아우성 속에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대통령과 국회의장, 여야 정치인들, 회사야 어찌됐든 나만 잘살면 된다며 주식을 팔아 치우고 자기 재산 지키기에만 급급해하는 해운회사 전·현직 대주주 등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황폐해진 땅을 새로 경작하려면 군주와 관료와 백성이 서로를 겹싸야 한다. 출발만 하면 길은 나오기 마련이다”는 VR 콘텐트의 대사에 호흡이 가다듬어진다. 우리는 언제 대통령에게 첨단기기를 통한 무중력 탁구 경기를 제안할 수 있을까.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