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신과, 항우울제 처방 60일만 가능…신경과 “제한 풀어야” 정신과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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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진구에 사는 서모(27·여)씨는 여섯 살 때부터 밤마다 사지가 뻣뻣해지고 아침에는 다리를 절면서 다닐 정도로 심한 뇌전증을 앓았다. 열 살 때 수술을 받았으나 2년 후 증상이 재발했다. 그러던 중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뇌전증 치료를 위해 다니던 신경과에서 우울증 약을 받아 증상이 다소 호전됐다. 하지만 주치의는 “항우울제를 계속 처방받으려면 정신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씨처럼 60일 이상 항우울제를 복용하려면 정신과에 가야 한다. 정신과를 제외한 타 진료과 의사는 항우울제를 장기 처방하는 게 제한돼 있다.

신경과 “치매, 우울증 동시치료 필수”
정신과 “약 오·남용 등 문제 많아”
복지부 “내달 의견 수렴해 개선”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급격한 고령화와 기대여명의 증가로 뇌졸중, 치매, 파킨슨병, 뇌전증 등 4대 신경계 질환자는 급증하고, 상당수는 우울증을 동반해 우울증 치료는 필수”라며 “60일 후에는 약을 중단하거나 증상 개선에 관계없이 무조건 정신과로 보내야 하는데 대부분의 환자가 이를 거절해 치료 중단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29일 국회에서 열린 ‘4대 신경계 질환 환자의 우울증 치료를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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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보건복지부 고시에 따르면 비(非)정신과 의사는 항우울제인 선택적 세로토닌 흡수 억제제(SSRI)를 60일 이상 처방할 수 없다. SSRI는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적고 안전해 우울증 환자의 1차 치료제로 많이 쓰인다. 1998년 정부는 당시만 해도 고가였던 SSRI가 많이 처방되면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이 되는 데다 우울증 약의 오·남용이 우려된다며 처방에 제한을 둔 바 있다. 미국·프랑스 등 20개 주요 국가 가운데 처방 제한 조치를 하는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4대 신경계 질환자의 우울증 발생률은 47~56%다. 특히 뇌전증 환자의 주요 우울장애 유병률은 일반인의 7배(22%)다. 홍 교수는 “고혈압은 심장내과 의사만 치료할 수 있고, 당뇨병은 내분비내과 의사만 치료할 수 있게 한다면 국민의 건강이 유지되겠느냐”며 “원칙적으로 모든 의사가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석정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증은 항우울제 하나만 준다고 해서 낫는 병이 아니다. 심리·사회적 측면을 같이 봐야 해 전문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분별한 장기 처방으로 인해 우울증 환자의 증상이 만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부는 다음달 중 간담회를 열고 의견 수렴을 거쳐 개선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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