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때처럼…‘클린턴 리퍼블리컨’ 유력인사만 50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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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혼탁한 미국 대선판에 ‘클린턴 리퍼블리컨(Cliton Repulican)’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공화당원이면서도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상대당 후보 지지하는 세력 형성
‘레이건 데모크랫’ 이후 두번째
민주, 공화당원 영입 조직도 발족
이번엔 ‘트럼프가 싫어서’가 이유
“대선에만 효과 국한될 것” 전망

클린턴을 지지하는 수퍼팩(정치활동위원회)인 ‘레디 포 힐러리(Ready for Hillary)’ 창립자인 애덤 파크호멘코는 최근 트위터에 “레이건 데모크랫(Reagan Democrat)이란 말을 기억하는가? 요즘은 ‘클린턴 리퍼블리컨’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고 썼다.

레이건 데모크랫은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인 로널드 레이건에 표를 던졌던 민주당원을 말한다. 주로 미 북부와 중서부 지역 근로자 계층 백인 유권자들이다. 이들은 당시 고물가와 불황에도 뚜렷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민주당 소속 대통령 지미 카터 대신 활기 넘쳤던 레이건을 선택했다. 이에 힘입어 압승한 레이건은 신자유주의와 강력한 안보로 상징되는 12년간(레이건 행정부 8년, 조지 부시 행정부 4년)의 보수 전성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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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해나, 구티에레스, 네그로폰테.

‘클린턴 리퍼블리컨’으로 변신하는 저명 공화당원들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3선의 리처드 해나(뉴욕)의원을 비롯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상무장관을 지낸 카를로스 구티에레스, 존 네그로폰테 전 국가정보국장 등이다. 클린턴 캠프가 지지를 확보했다고 밝힌 유력 공화당 인사는 50명에 달한다.

클린턴 캠프는 ‘클린턴 리퍼블리컨’을 새로운 트렌드로 만들기 위해 공세를 펼치고 있다. 공화당 인사 영입을 위해 ‘투게더 포 아메리카(Together for America)’라는 단체까지 만들었다.

클린턴도 기회 있을 때마다 공화당원들의 주요 관심사인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자신의 경쟁력과 ‘매파 성향’을 내세운다. 또 변덕스럽고 기질이 불안정한 도널드 트럼프는 핵무기 발사 권한을 지닌 미군 통수권자로 부적절하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클린턴 리퍼블리컨 현상이 레이건 데모크랫처럼 미국 정치사를 새로 쓰기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 많다. 우선 공화당 지도층 인사들의 이탈이 평당원들에게 도미노 효과를 일으킬지 아직 분명치 않다. 심지어 이런 이탈마저 이번 대선에 국한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레이건 데모크랫은 레이건의 매력에 매료돼 달려갔지만, 클린턴 리퍼블리컨은 클린턴이 좋아서가 아니라 트럼프가 싫어서 클린턴에게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 젤리슨 오하이오대 교수는 의회 전문지 더 힐에 “클린턴 리퍼블리컨 현상은 주로 트럼프에 대한 반작용에 기인하고 있어 단지 이번 선거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해석까지 있다.

실제로 트럼프가 클린턴의 생명 위협을 교사하는 듯한 발언을 비롯해 도를 넘은 막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클린턴은 공화당원들을 사로잡을 한 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9일엔 클린턴의 국무장관 재임 시절 국무부와 클린턴 재단 사이의 유착을 보여주는 e메일이 공개되며 여전히 e메일 스캔들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보수 성향 시민단체인 ‘사법감시’가 공개한 클린턴의 e메일 중에는 클린턴의 핵심 측근인 후마 애버딘 전 수행실장과 셰릴 밀스 비서실장이 클린턴 재단의 핵심 직원과 주고받은 것도 있다. 이에 따르면 애버딘은 재단 직원의 부탁을 받고 재단의 고액 기부자인 레바논계 나이지리아인 사업자를 주 레바논 미국 대사와 연결시켜준 것으로 돼있다. 이 직원이 재단 관련 인물의 인사 청탁을 한 것도 있다.

이에 대해 트럼프 캠프의 스티븐 밀러 정책국장은 “클린턴은 공직을 개인적 축재를 위한 수단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가 벌어들인 모든 돈은 국민의 복지를 희생한 대가”라고 비판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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