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무한 책임, 최고경영자의 숙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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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
산업부 기자

“소선(小善)은 대악(大惡)과 닮아 있고, 대선(大善)은 비정(非情)과 닮아 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의 말이다. 우리나라에선 구조조정이나 감원 같은 조직 슬림화의 금언처럼 해석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이나모리 회장은 2010년 도산 위기에 빠진 일본항공(JAL)의 구원투수로 나서 혹독한 구조조정 끝에 일본 기업 역사상 최단기 재상장이란 성과를 얻어낸 바 있다. 하지만 이나모리 회장이 세운 교세라는 평생 고용을 근간으로 하는 교토 강소(强小)기업의 전통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이나모리 회장도 자신의 경영철학을 학습하는 연구모임 세이와주쿠(盛和塾)에서 “JAL의 감원은 내 경영철학에서 예외적인 사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나모리 회장의 금언에는 물론 방만한 조직을 타파해야 한다는 혁신도 포함된다. 하지만 근본적 의미에서 ‘비정한 대선’이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 해서, 하급자가 맡은 문제라 해서 최종 책임을 외면하는 건 경영의 정도가 아니란 뜻으로 해석해야 옳다.

아우디·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사건으로 사법처리를 앞두고 있는 박동훈 르노삼성자동차 사장은 최근 측근들에게 “기술자가 아닌 이상 배기가스 조작 문제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본사와 기술팀이 국내 인증 절차를 문제 없이 처리할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7년 전 아우디·폴크스바겐코리아 사장이었던 그는 폴크스바겐의 TDI(터보직분사) 디젤엔진 전 차종 미디어 시승행사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디젤엔진을 세계 최초로 만든 독일차의 기술력과 노하우는 다른 나라에서 따라오기 어렵습니다. 내가 엔지니어는 아니지만 폴크스바겐그룹은 성능과 환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친환경 클린디젤 분야에서 세계 최고임을 자부합니다.”

박 사장은 수입차 업계의 성공신화였고 2013년 르노삼성으로 옮긴 뒤에도 QM3·SM6 등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7년의 시차를 두고 그의 말을 떠올린 건 “난 기술자가 아니다”라는 말 때문이다.

그가 아우디·폴크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을 알고도 묵과했는지, 정말로 몰랐는지는 앞으로 검찰수사에서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최고 경영자는 “난 기술자가 아니다”란 말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나모리 회장이 말한 ‘비정한 대선’은 최고경영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이동현 산업부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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