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영어 유창한 이용호도, 조용했던 이수용도 결국은 ‘왕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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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달랐지만 결국엔 같았다. 2015년, 2016년 각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갈라(Gala)만찬에 참석한 북한 외무상들 이야기다.

2년 연속 ARF 만찬 취재해 보니
이수용과 달리 이용호는 사교적
스타일 달라도 찬밥신세 매한가지
이용호, 춤 상대 없어 무대 못 올라
케리는 같은 테이블 와서도 모른 체

의장국이 주최하는 갈라만찬은 단순히 와인을 마시며 사교하는 자리만이 아니다. 다른 나라 장관들과의 친교관계, 수십 명의 장관이 모인 가운데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는 능력 등 외교 수장으로서의 퍼포먼스를 엿볼 수 있는 무대다. 북한 외무상이 참석하는 가장 공개적인 행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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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左), 이용호(右)

지난해 8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ARF에는 이수용(당 국제담당 부위원장) 당시 외무상이 왔다. 올해 라오스 비엔티안에는 이용호 외무상이 참석했다. 둘은 현재 북한 외교라인의 투톱이기도 하다.

2년 연속 ARF를 취재하며 북한 두 외무상을 갈라만찬 현장에서 볼 수 있었다.

만찬장에서 드러난 이수용과 이용호의 가장 큰 차이점은 통역이었다.

이용호 근처에는 통역이 없었다. 그는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미국 관료들이 비공식적으로 북한 관료들을 만날 때 북한에선 항상 두 명씩 나온다고 한다. 서로 감시를 해야 하기 때문이지만 부족한 영어 실력도 원인이다. 하지만 이용호는 항상 혼자 나가서 미국 관료들을 만났다고 한다. 외교가 소식통은 이를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이수용은 만찬 내내 뒤에 통역이 앉아 귓속말을 해줬다. 사회자가 영어로 유머를 했을 때 다른 장관들보다 한 박자 늦게 웃곤 했다. 당시 ARF에 참석했던 정부 관계자는 “알려지기로는 영어와 프랑스어 모두 유창하다고 했는데, 영어로 진행된 다른 회의에서도 계속 통역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니구나 싶었다. 스위스에서 오래 근무했으니 아무래도 영어보다는 프랑스어가 편한 것 같더라”고 귀띔했다.

그는 갈라만찬 중 굳은 표정으로 바로 옆에 앉은 장관들과 한마디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만찬 전 대기실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고 한다. 그보다 한 해 전 미얀마에서 열린 ARF 갈라만찬 때는 행사 중간에 그냥 자리를 떴다. 반면 이용호는 왼쪽에 앉은 파키스탄, 오른쪽에 앉은 파푸아뉴기니 외교장관과 웃으면서 계속 담소를 나눴다. 귀빈대기실에서 만난 장관들과는 악수를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지난해 갈라만찬의 데자뷔와 같은 장면이 이어졌다.

만찬장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이용호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케리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든 장관과 이야기를 하거나 안부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이용호만 모른 척하고 건너뛰었다. 줄리 비숍 호주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옆 테이블에 앉았던 중국 왕이(王毅) 부장도, 같은 테이블에 있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장관도 이용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이용호는 옆자리 장관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혼자서 할랄푸드(무슬림이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식품)만 열심히 먹었다. 와인까지 한 차례 리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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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만찬의 마무리인 가무 순서 때도 마찬가지였다. 갈라만찬은 의장국 장관의 주도로 여러 장관이 무대에서 어울려 춤을 추며 마무리한다. 의장국이 함께하고 싶은 장관을 찍어 불러내기도 한다. 지난해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자리를 뜨려다 말레이시아 장관이 수차례 지목해 결국 무대에 올라 아세안기를 흔들며 함께 춤을 췄다. 하지만 이수용도 이용호도 2년 연속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어느 장관도 함께 춤을 추자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용호는 아예 가무가 이어지던 중간에 자리를 떴다.

이수용과 이용호는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흥겨운 전통음악이 어울리지 않는, 고립된 섬 같았던 모습에선 같은 사람이었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갈라만찬이었다.

비엔티안=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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