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기가 겁난다(5)|시험도 주먹으로 치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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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겨울방학을 눈앞에 둔 구랍14일 하오 서울영동 관세청 부근 빈터.
영하10도의 혹한에 얼어붙은 땅바닥엔 부근 A고교1년 박모군 (17) 이 무릎을 꿇고 있고 같은반 이모군 (17) 은 깨진 맥주병을든채 험악한 표정으로 박군을 노려보고 있었다.『얼굴을 뭉개버리기 전에 똑바로 꿇어, 이 짜샤. 그만큼 좋은 말로 했으면 알아서 기어야 할게 아냐. 꼭 뜨거운 맛을 보아야 알아듣겠냐?』
이군은 오른발을 들어 냅다 박군의 뒷덜미를 내리찍는다.
『잘못했어, 미안해. 내일 시험부턴 틀림없이 보여주겠어』
『좋았어. 오늘은 일단 살려주겠다. 내일부턴 확실하게 해』
학기말 시험 첫날이었던 이날 뒷자리의 박군에게 시험답안을 보여주지 않았다해서 하교길에 끌려나온 이군. 30여분에 걸친 온갖 협박과 폭력의 위협 끝에 이군이 다음날부터 감독선생의 눈을 피해가며 박군의 커닝을 도와주었음은 물론이다.
『야, 책벌레. 이번 시험때도 알지?』
2학기 중간고사 첫날인 지난해 10윌7일 아침 서울 B중학교 본관4층 화장실.
이학교 「쌈일등」 (싸움1등) 장모군이 「책벌레」란 별명의 우등생 김모군16)을 몰아세운다.
김군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려는 순간, 장군의 입에선 상스런 욕이 튀어나온다.『이 ××. 정말 죽고싶어? 하겠어, 못하겠어』
대형 드라이버를 슬쩍 내보이는 장군의 서슬에 눌려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김군.
장군은 2학년 초 강북의 C중학을 자퇴하고 전학온뒤 시험때마다 주먹으로 김군을 위협해 서험답안을 그대로 베껴왔다.
주먹이나 흉기로 돈대신 성적을 훔치는 또다른 교실폭력의 현장. 주먹만 있으면 밤샘공부가 필요없이 거뜬히 좋은 성적을 따낼수 있다.
D고 2학년3반 송모군(17) 과 김모군 (17) 은「악어와 악어새」로 통하는 관계.
학급성적 5위권의 우등생인 송군은 김군으로부터 갖은 위협에 시달리다 못해 이제는 아예 시험때면 답안을 보여주고 그 댓가로 주먹으로 소문난 김군의 보호(?)를 받고 있다.
머리와 주먹의 만남인 셈이다.
공부와 담을 쌓은 학생도 힘만 있으면 되는 폭력교실. 그래서 우등생 주변의 자리는 「명당자리」로 불리기도 한다.
『폭력학생에 의한 부정행위는 중학교보다 고교교실에서 더욱 성행하고 있습니다. 학교성적이 대학입학내신성적과 곧바로 연결 되거든요』 K고교 김모교사(35) 의 말.
대입학력고사 실시후 고교의 시험이 대부분 4지선다형의 객관식 일변도로 바뀐 것도 이들의 부정행위를 손쉽게 하는 한 요인. 그러나 피해학생은 보복이두려워 입을 다물고, 학교측은 뚜렷한 증거가 없어 이렇다할 해결책을 찾지못하고 있는 상태. 그만큼 학교교실이 안으로 곪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10월 E고 1학년국사담당 신모교사 (35) 는2학기 중간고사 답안을 채점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1학년13반 47,48번 두학생의 답안이 정오답 순서뿐 아니라 점수도86점으로 똑같았기 때문. 특히 48번 김모군 (17) 은 이른바 불량학생으로 평소성적이 30점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갑자기 점수가 껑충 뛰어올라 있었던것.
신교사가 두 학생을 불러 조사해본 결과 시험시간중 뒷자리의 김군이 성적이 비교적 좋은 47번 이모군(17)의 등을 송곳으로 찌르며 위협, 정답쪽지를 이군으로부터 건네받아 그대로 베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뜻밖에도 「가해자」인 김군은 위협사실을 순순히 털어놓는 데도 정작「피해자」 인 이군은 보복을 우려했던 탓인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것이 신교사의 고백이다.<정순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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