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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WMD 게이트'로 들끓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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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 무기사찰 전문가의 죽음이 영국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다. 데이비드 켈리(59)가 뉴스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불과 2주 전. 영국 정부와 BBC방송 간에 논란이 뜨거웠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문서 왜곡 시비'의 중심에 선 '얼굴 없는 취재원'이 바로 켈리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는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됐고, 그 사흘 뒤인 지난 18일 변사체로 발견됐다.

지난 5월 BBC방송의 국방전문기자 앤드루 길리건이 지난해 9월 영국 정부가 발표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관련 문서가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길리건에 따르면 토니 블레어 총리의 공보수석인 앨라스테어 캠벨이 '이라크는 45분 만에 대량살상무기를 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이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강압적으로 집어넣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캠벨은 사실이 아니라며 BBC에 사과를 요구했다. BBC는 '보도내용은 틀림없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 제보자를 밝힐 수 없다'고 버텼다.

집권 노동당이 주도하는 의회의 외무위원회는 지난 7일 실태조사를 토대로 "캠벨이 문서를 조작한 것은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보수당 의원들은 '조사가 충분하지 않다'며 반발했다. BBC 역시 승복하지 않았다. 공보수석 캠벨 개인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캠벨은 '사실을 다소 비틀어 자신에 유리하게 대중적 이미지를 조작하는 홍보전문가'라는 뜻을 지닌 스핀 닥터(Spin Doctor)의 대표적인 인물로 블레어의 분신과 같은 실세다.

일이 더 꼬여버린 것은 국방부가 "데이비드 켈리가 문제의 취재원"이라고 공개했기 때문이다. 내사 과정에서 켈리 스스로 "BBC 기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BBC도 그가 취재원이었음을 20일 공식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주된 취재원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회는 켈리의 이름이 공개되자 청문회의 증언자로 그를 소환했다.

청문회는 상당히 고압적인 분위기였고 켈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매우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언론은 그가 며칠 전 가족들에게 "국방부가 내 이름을 밝혔을 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으며 "사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의 죽음을 보도한 현지 언론들은 '또 다른 전쟁의 희생자'(더타임스)라는 동정과 함께 '블레어의 새로운 위기'(파이낸셜 타임스)에 초점을 맞췄다. '희생자'란 시각은 정부의 무리한 이라크 전쟁 명분 쌓기, 그래서 불거진 언론과 정치권력의 싸움판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는 의미다.

이 같은 동정심은 곧 블레어에 대한 실망감과 비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단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보고서가 과장됐다는 비난, 곧 참전이 무리였다는 주장이 따갑다.

동시에 물의를 빚은 스핀 닥터, 그리고 켈리의 이름을 공개한 국방장관의 해임 요구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에선 블레어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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